철통 경호 미국을 방문한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왼쪽)이 3일 뉴욕 맨해튼의 한 식당에서 오찬을 마친 뒤 걸어 나오고 있다. 선글라스를 낀 미국 정부의 경호요원이 김 부상에게 밀착해 다른 사람의 접근을 막고 있다. 뉴욕=연합뉴스
최근 6자회담의 타결로 북한 핵문제의 해법이 모색되고 있는 가운데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의 보유 여부가 한국과 미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양성철 전 주미대사는 4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HEU 프로그램에 대한 미국의 정보는 과장됐다”고 주장했다. 2002년 10월 당시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가 평양을 방문해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과 만난 뒤 “북한이 HEU에 의한 핵 개발 사실을 시인했다”고 발표한 게 잘못됐다는 것이다.
또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최근 미국 정부가 북한의 HEU 프로그램에 대한 강경대응 방침을 바꾸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HEU를 둘러싼 논란의 실체를 점검해본다.
▽HEU에 대한 오해=양 전 대사는 “지난해 5월 켈리 전 차관보가 ‘북한은 HEU 프로그램이 아니라 농축우라늄(EU)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며 “북한이 HEU 프로그램 보유를 시인했다는 미국의 발표는 과장된 게 사실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이는 HEU와 EU가 전혀 다르다는 점을 전제로 한 판단이다.
그러나 워싱턴의 고위 외교소식통은 “EU를 생산하는 시설은 HEU를 생산하는 시설과 동일하다”며 “북한이 우라늄을 농축했다면 그건 분명히 핵 시설 동결을 약속한 1994년의 북-미 제네바 합의를 깬 것”이라고 양 전 대사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따라서 켈리 전 차관보가 양 전 대사에게 했다는 ‘북한의 EU 프로그램 보유’ 발언을 근거로 미국이 HEU 관련 정보를 부풀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약이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북한이 HEU의 전 단계인 우라늄 농축을 어느 수준까지 달성했다고 보는 근거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2002년 10월 평양에선=켈리 전 차관보는 당시 8명의 회담 대표단과 평양에 갔다. 통역인 김동현(미국명 통 김·71) 고려대 연구교수와 부인이 한국인인 데이비드 스트로브(현 서울대 방문교수) 당시 국무부 한국과장 등 한국어가 능통한 사람들이 포함돼 있었다.
북한은 HEU 프로그램 개발 의혹에 대해 처음엔 부인했다. 그러나 회담 사흘째 강석주 제1부상이 태도를 바꿔 구체적인 언급을 했다.
김 교수는 최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HEU 프로그램에 관한) 강 제1부상의 정확한 발언은 ‘우리는 이것보다 더한 것도 만들게 돼 있다’였다”고 밝혔다. 또 강 제1부상은 “앞으로 별의 별 게 다 나올 것”이라고 덧붙여 추가적인 상황 악화도 암시했다는 것이다.
미국 대표단은 강 제1부상과 나눈 40분간의 회동을 복기했다. 그리고 “강 제1부상이 시인했다”고 결론짓는 데 이견이 없었다고 스트로브 당시 과장은 밝힌 바 있다.
▽미국은 정말 후퇴하나=최근 미국의 정보가 과장됐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북한이 HEU 프로그램에 해당하는 원심분리기 등의 장비는 도입했지만 이를 사용해 우라늄 농축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HEU 프로그램도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조지프 디트라니 미 국가정보국 북한담당관은 지난달 27일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북한의) HEU 프로그램이 현재 존재하는지에 대해선 중간 수준의 신뢰도(mid-confidence level)를 갖고 있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워싱턴포스트는 ‘중간 수준’이란 표현에 주목하면서 “북한이 활발한 HEU 프로그램을 가졌다고 오랫동안 단언해 온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물러서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대북 협상파가 북한의 HEU 프로그램 문제가 6자회담 진전을 가로막을 것을 우려해 HEU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을 희석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디트라니 담당관이 ‘중간 수준의 신뢰도’라고 밝힌 것은 북한의 우라늄 핵무기 개발을 위한 장비 도입은 분명하지만 이를 이용한 핵 활동이 어느 정도까지 진척됐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기 때문이며 이를 정보 왜곡과 과장으로 볼 수 없다는 게 한국과 미국 정부 당국자들의 판단이다.
유력한 외교 소식통은 “미국 정부는 북한이 보유한 원심분리기의 생산 일련번호까지 확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존 네그로폰테 미 국무부 부장관은 2일 일본을 방문해 “정보기관들은 북한이 과거에 HEU 프로그램을 가졌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으며 아직도 이 프로그램이 계속되고 있다는 확신을 놓지 않고 있다는 것이 내가 정보기관들을 통해 얻은 판단”이라고 밝혔다.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이명건 기자 gun43@donga.com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이란’::
우라늄에서 핵분열을 일으키는 물질인 우라늄235를 정제하기 위한 계획과 원심분리기 알루미늄튜브 등의 장비 및 시설, 이를 가동해 얻은 고농축우라늄으로 만든 핵무기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원심분리기는 여러 곳에 분산해 은닉할 수 있어 장기간 노출되지 않고 고농축우라늄을 생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