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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성 스포츠전문기자의&joy]구례 산수유마을 트레킹

입력 | 2007-03-10 02:59:00

봄은 아이들 발자국을 따라 온다. 파릇파릇 헌걸차게 솟아오르는 보리밭 이랑을 타고 온다. 생명 가득한 들판 너머로 성큼성큼 달려온다. 산수유 투욱∼툭 터지는 지리산 자락. 봄이 다디달다. 6일 야외수업을 하고 있는 구례중동초등학교 어린이들. 뒤편 멀리 눈에 덮인 지리산 만복대와 노고단이 보인다. 구례=박영철 기자

상위마을 돌담길의 산수유꽃 터널. 15일 시작되는 산수유꽃 축제에는 전국에서 수십만 명이 이 마을을 찾는다. 구례=박영철 기자


《나무의 혈관에 도는 피가/ 노오랗다는 것은/ 이른 봄 피어나는 산수유꽃을 보면 안다./ 아직 늦추위로/ 온 숲에 기승을 부리는 독감,/ 밤새 열에 시달린 나무는 이 아침/ 기침을 한다./ 콜록 콜록/ 마른 가지에 번지는 노오란/ 열꽃,/ 나무는 생명을 먹지 않는 까닭에 결코/ 그 피가 붉을 수 없다. (오세영의 ‘산수유’ 전문)》


[동영상]구례로 산수유 꽃 구경가세…가자! 웰빙 트레킹

두 번 핀다 노란 꽃 오종종… 잎보다 먼저 피어

산수유 꽃에선 늙은 스님의 마른기침 소리가 들린다. 콜록! 콜록! 겨우내 절집 뒷방에서 신열에 시달리다 게워낸 노란 열꽃. 나무는 마른 명태처럼 깡마르다. 기름기 없는 마라톤 선수 몸 같다. 나무껍질은 연한 갈색, 그 위에 검버섯이 여기저기 피었다. 갈퀴 같은 뿌리는 모래밭이나 돌밭에 뻗어 구불퉁구불퉁 하다. 고행하는 사막의 성자 머리칼 닮았다.

산수유는 꽃이 먼저고, 잎은 나중 핀다. 가슴속이 용광로처럼 뜨거워 우선 꽃부터 토해놓는다. 꽃은 우르르 돋아 앙증맞다. 별과자 모양의 꽃판 하나에 20~30개의 꽃이 오종종 달려있다. 꽃은 투욱~ 툭! 두 번 핀다. 한번은 겉 꽃이 열리는 소리, 두 번째는 속 꽃이 피는 소리다. 꽃말은 지속 불변. 이 ‘시러배같은’ 세상!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킬 건 꼭 지킨다.

전남 구례 산동일대는 지금 온통 ‘노란 파스텔그림’ 세상이다. 뒷짐 지고 이 골목 저 골짜기 어슬렁거리다보면 달디 단 봄바람이 콧속을 간질인다. 산수유 꽃 터널을 이룬 시냇가. 그 사이로 졸졸~흐르는 눈 녹은 물. 마을 돌담길 고샅엔 은은한 산수유꽃 냄새가 가득하다. 아이들이 깔깔대며 뛰놀고 강아지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산수유 꽃 그림자를 좇는다. 주인 없는 울안엔 붉은 동백꽃이 소리 없이 목을 꺾고 있다. 밭둑엔 쑥이 한참이나 올라왔다. 냉이 달래 씀바귀도 지천이다. 마을 뒤편에선 맑은 대숲 바람 소리. 서걱서걱 조릿대 몸 부비는 소리. 고로쇠나무 물오르는 소리. 매화 꽃눈 틔는 소리. 먼 곳 장끼 우는 소리.

‘대학나무’ 열매는 약재… 한때 고소득 자랑

꽃 중의 꽃은 누가 뭐래도 상위마을 산수유다. 지리산 만복대 자락 바로 밑에 터 잡아 동네를 이룬지 600여 년. 수백 년 묵은 산수유나무가 곳곳에 똬리를 틀고 서있다. 한 때 100여 가구가 넘었지만 지금은 25가구 68명. 60대 이상이 대부분이다. 한 집에 적게는 수십 그루씩 많게는 수천그루씩 산수유나무를 소유하고 있다. 시냇가나 길가 혹은 밭둑길에 아무렇게나 서있는 듯 보이지만 그 어떤 나무든 주인 없는 나무는 없다.

한 때 산수유나무는 ‘대학나무’라고 불렸다. 두세 그루만 있으면 가을에 산수유열매를 팔아 자식을 대학까지 가르칠 수 있었던 것. 지금은 값싼 중국산에 밀려 옛날만큼 짭짤한 수익은 올리지 못한다. 열매는 대부분 한약재로 쓰이며 술을 담그기도 한다.

40년 동안이나 상위마을 이장을 하고 있는 구형근씨(70)는 “말린 산수유열매 600g 한 봉지에 5만원까지 간 적이 있지만 지금은 1만 원대에 불과하다. 한 나무에서 보통 20~70kg정도 수확하니까 한 가구당 수백만~수천만 원까지 소득을 올리는 셈이다. 이사 갈 땐 산수유나무도 한 그루에 수십 만 원씩 파는 경우도 있다”고 말한다.

올 산수유 꽃은 열흘정도 일찍 피었다. 이미 겉 꽃을 피우고 이제 속 꽃이 우우우 눈을 뜨고 있다. 꽃잎이 며칠 전 내린 봄눈에 촉촉이 젖어 더욱 고혹적이다. 해마다 3월말이나 열리던 산수유축제(15~18일)도 예년보다 2주일이나 앞당겼다. 마을 민박은 두 달 전 이미 예약이 동났다.

정선욱씨(38·골드윈코리아 과장)는 “남도 들판의 파릇파릇 돋은 보리밭을 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여기 노란 산수유 꽃을 보니 진짜 봄이 온 줄을 알겠다”라고 말한다. 신성일씨(32·롯데백화점 본점 매니저)도 “산수유나무가 이렇게 큰 줄 몰랐다. 꽃도 무지무지하게 많이 달렸다. 점심땐 난생 처음 고로쇠 물까지 마셔봤는데 달작지근하고 싱그러운 맛이 너무 좋았다”고 말한다.

상위마을에서 500여m 아래쪽인 반곡마을 산수유 꽃도 일품이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시내 가운데 너른 바위 양편으로 꽃이 활짝 피었다. 사이사이 버들강아지가 봄바람에 흔들리고, 매화꽃이 막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소박하다 꽃은 볼품없지만 멀리서 보면 장관

산수유 꽃은 소박하다. 꽃도 하나하나 뜯어보면 촌스럽다. 마치 발갛게 달아오르다 지쳐버린 노란 쇳물 같다. 하지만 멀리서 무더기로 핀 ‘산수유 꽃 떼’를 보면 은근하고 그윽하다. 바람이 불면 벌 떼들이 한순간 부르르 날개 짓을 하는 것 같다. 수천수만의 노란 물결이 일렁인다. 그 꽃그늘에 앉아 어느새 사라져버린 ‘나의 봄날’을 생각한다. ‘새한테 말을 걸면/ 내 목소리는 새소리/ 꽃한테 말을 걸면/ 내 목소리는 꽃잎’ (정채봉의 ‘꽃잎’)

그렇다. 어느 누군들 봄날이 없었으랴! 또 그 누군들 그늘이 없었으랴! 모두 하나하나 뜯어보면 ‘얼룩 투성이의 삶’이로되, 그 삶들이 한곳에 모이면 ‘사람 꽃’이 된다. 눈물 속에 핀 꽃. 산수유 꽃에 말을 걸면, 산수유 꽃잎이 된다.

▼ 내친걸음 노고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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