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에 잊지 못할 기쁜 생일이 됐다.”
남북 장관급회담 수석대표로 1일 평양에서 북한 체제를 상징하는 ‘김정일화(花)’를 생일선물로 받은 이재정 통일부 장관은 크게 감동했나 보다. 그는 케이크와 미역국을 곁들인 생일상도 받았다. 기대하지 않았다면 감동받을 만하다. 그런데 그는 북측이 깜짝 생일파티를 해준 의도나 알고 감동한 것일까.
이 장관을 보면서 ‘생의 한가운데’로 유명한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가 쓴 ‘북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1980년 린저가 북한에 갔을 때 생일이 됐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의 생일에도 북측은 깜짝 파티를 열어 줬다. 감동한 린저는 “얼마나 친절하고 세련된 민족인가!”라고 극찬했다.
그 감동 때문인지, 린저의 ‘북한 이야기’는 북한 체제와 김일성 부자 찬양이 주조다. 그리고 이 책은 1980년대 말 국내 운동권의 필독서로 주사파를 포함한 좌파세력의 자양분 역할을 톡톡히 했다. 생일파티는 공짜가 아니었다.
9일자 신문에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면담하는 이해찬 전 총리의 사진이 실렸다. 그는 웃고 있었다. 총리 시절 자주 보이던 사나운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남에서는 3·1절 골프 파문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지만 북에서는 서열 2위 권력자의 환대를 받았으니 감동했을 법도 하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우리 사회에는 북한의 눈치를 보고 김정일 정권에 아부하는 사람이 늘었다. 그들은 민족과 통일을 위해서라지만 자신의 출세, 기득권 유지, 입지 강화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진보의 대표 격인 백낙청 교수가 “우리 사회에서 진보를 표방하는 지식인, 학자들 상당수가 1987년 이래 민주화가 가져온 공간 속에서 상당히 즐겁게 살고 있다”고 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일까. 10년 만에 3기 연속 집권에 실패할지도 모르는 처지에 있는 좌파 진영은 지금 논쟁 중이다. 한나라당에 정권을 넘겨줘도 되느니 마느니가 논쟁 주제다. 위기의식을 부추겨 세력을 다시 결집하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진정한 진보에 반대할 생각은 전혀 없다. 문제는 진보로 위장하고 남북에 이중 잣대를 들이대는 친북좌파 세력이다.
이들은 독재와 인권탄압을 이유로 이승만의 건국 공로도, 박정희의 경제발전 공로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60년 부자 세습 왕조’인 북한 집권세력의 독재와 인권탄압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다. 친일과 독재의 과거사는 무덤까지 파헤치면서 친북좌파 행적에는 눈을 감고, 훈장까지 준다.
인권과 반전반핵, 평화를 추구하는 진짜 진보가 어떻게 북한의 꼭두각시 노릇이나 할 수 있는가. 진정한 진보세력이라면 북한의 민주화, 북한 주민의 자유를 위해 목소리를 내야 정상이다. 진짜 진보라면 핵 위협으로 국제사회의 지원이나 강요하는 비정상 국가를 정상 국가로 바꿀 방법에 대해 논쟁해야 옳다. 북한은 마약 밀매와 위조지폐 제작 같은 불법행위로 연간 최대 10억 달러의 수익을 올린다는 나라다.
북한식 독재에 반대하는 진짜 진보라면 진보로 위장한 맹목적 친(親)김정일파와 결별해야 한다. 그게 진짜 진보가 사는 길이다.
이 장관의 순진한 감동이나 린저의 비현실적 환상으로는 북한을 정상 국가로 바꿀 수 없다.
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