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와 다음 주, 북한 핵문제와 관련한 움직임이 봇물 터지듯 한다. 6자회담 ‘2·13합의’를 이뤄 낸 베이징에서는 2차 북-미 관계 정상화 회의를 비롯해 5개 실무그룹 회의가 연쇄적으로 열리고, 6차 6자회담 본회의도 예정돼 있다. 미국의 일부 대북(對北) 금융제재 해제도 발표될 예정이다. 남북 간엔 경의·동해선 열차 시험운행 논의를 위한 실무접촉이 진행 중이다.
피상적으로만 보면 북핵 문제 해결과 ‘한반도의 봄’이 머지않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지금의 진행 상황은 정해진 일정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고, 본격적인 담판을 앞둔 군불 때기에 불과하다. 여기저기서 남북정상회담을 하면 모든 게 풀릴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이번엔 북한과 미국의 태도가 변치 않아 ‘옥동자’를 탄생시킬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지만 아직은 성급한 기대다.
우선 남북정상회담을 보자. 이벤트성이라면 가능하겠지만 실질적인 회담이 되려면 정상 간에 구체적으로 주고받을 게 있어야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백기투항이나 다름없는 통 큰 결단으로 모든 핵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한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면 실제 내놓을 만한 게 없다.
남측도 마찬가지다. 국민 동의 없이 국가보안법 폐지와 주한미군 철수를 약속할 수 있겠는가. 북에 미국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하기도 어렵다. 노무현 대통령부터 “아직은 때가 아니다”며 명확한 태도를 밝히지 않고 있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대통령은 핵실험 때문에 아직도 북에 일말의 의구심을 갖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북한과 미국의 태도가 언제 돌변할지도 알 수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북-미관계의 성공을 저해할 어떤 조짐도 없다”면서 ‘통일의 희망’까지 거론했지만 과연 그럴까. 우라늄 핵개발 의혹 때문에 8년간이나 지속되던 제네바합의가 깨졌다. 천신만고 끝에 탄생한 9·19공동성명은 위폐문제 때문에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휴지조각이 될 뻔했다.
구체적으로 꼽지 않더라도 북의 변덕스러움은 과거가 말해 준다. 미국에는 아직도 대북 강경론자들이 건재하고 온건론자들마저 북을 반신반의(半信半疑)한다. “북핵 문제 해결은 신뢰의 문제가 아니라 북한이 주어진 임무를 이행할지의 문제”라는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의 말에 그 답이 있다. 웬디 셔먼 전 대북정책조정관은 “북한은 신뢰할 수 있는 상대라기보다는 약속 이행 여부를 확인해야 하는 상대”라고 더 심하게 표현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열린우리당은 지금의 해빙무드를 과신하면서 그것이 마치 자신들의 공(功)인 양 포장하고 과실(果實) 챙기기에 바쁘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판을 흔들고 ‘평화’ 이슈를 선점하려는 정략이겠지만 국민에게 엉뚱한 환상을 심어 줄까 걱정스럽다. 한나라당마저 대북정책 기조를 바꾸겠다고 선언했으니 어지간히 다급하고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북핵 해결과 남북 해빙에 기대를 갖고 움직이는 것은 좋다. 그러나 무슨 협상이든 지나치게 낙관하거나 조급해하는 쪽이 지게 마련이다. 더구나 북한은 특수한 상대다. 진정으로 북핵 문제 해결을 바란다면 호들갑을 떨거나 엉뚱한 욕심을 부려선 안 된다. 차분하게 6자회담의 진행 과정을 따라가면서 주도면밀하게 대응하는 것이 정도(正道)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