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의 나이로 ‘돌부처’ 이창호 9단을 물리치고 통산 10번째 국수에 오른 윤준상 5단. 축구를 좋아하고 효성이 지극한 윤 5단은 “여전히 바둑을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미옥 기자
《“로꾸거∼ 로꾸거∼ 말해말∼.” 통화 대기음에서 슈퍼주니어-T의 경쾌한 댄스 트로트 멜로디가 흐른다. “아, 벌써 들어가 계세요? 금방 갈게요.”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윤준상 5단(3월 16일 제50회 국수전 우승으로 1단 승단)은 흰 재킷에 청바지의 깔끔한 옷차림이었다. ‘국수(國手)’라는 타이틀보다 스무 살 청년이란 사실이(정확히 19년 4개월) 먼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오늘은 제가 살게요.” 기자의 오렌지 주스와 본인의 커피 값을 선뜻 계산한다. “오∼ 국수전 상금(4000만 원) 들어왔나 봐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싱긋 웃으며 “한턱내야죠”라며 받는다.》
“바둑은 끝모를 우물… 퍼낼수록 새 手 보여”
1월 9일 국수전 제1국이 열릴 때만 해도 윤 5단의 승리를 점친 이는 거의 없었다. 도전자 결승전에서 박영훈 9단을 2-0 퍼펙트로 물리친 기세로 과연 이창호 9단에게 몇 판이나 따낼 수 있을지가 관심거리였을 정도. 그도 그럴 것이 2001년 입단 후 아직까지 타이틀 하나 없었으며 최고 성적도 2002년 현대자동차배 기성전에서 조훈현 9단에게 1-2로 패한 도전자 결승전 진출 정도였기 때문. 그러나 이 같은 예상을 뒤엎고 16일 윤 5단은 약관의 나이에 국내 최고수라는 ‘국수’에 올랐다.
윤 5단이 바둑을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시절. 명절 때마다 아버지와 친척들이 두는 바둑이 재미있어 보였다. 어떻게든 참견을 하고 싶은데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윤 5단은 바둑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 신동 얘기 좀 들었나요?”라고 묻자 손을 내저으며 “아뇨, 그런 말은 전혀…. 주위에서는 열심히 노력하면 괜찮을 것 같다는 정도였어요(웃음)”라고 말한다.
그렇게 바둑학원에서 조금씩 배우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바둑에 몰두하다 보니 친구들과의 교류가 거의 끊겼다. “아쉽죠. 그래서 초등학교 때가 제일 그리워요. 수업 받고 친구들하고 장난치고 참 재미있었는데….”
친구들하고 어울리지 못해 답답하지 않으냐고 묻자 친한 또래 바둑 기사가 많아 “할 건 다 하고 지내요”라고 한다. “박영훈 9단 등 1985년생 ‘송아지 3총사’나 이영구 6단 등 입단 동기들하고 잘 어울리죠. 같이 PC방에 가서 스타크래프트나 카트라이더 같은 게임도 하고 노래방도 가요.”
대국이 있는 날 외의 시간은 자유롭지만 감각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바둑 공부를 한다. “최철한 7단의 연구실에 가서 오전 10시 반부터 오후 5시까지 공부하는데 중간에 졸리면 쉬고 4시쯤 되면 연구실 근처 초등학교에 가서 5 대 5 축구를 많이 해요”라고 말했다.
“축구를 좋아하나 봐요?”라고 묻자 눈빛이 반짝거렸다. “어제 박지성 선수 경기 봤어요? 두 골 넣었는데….” 봤다고 답하자 커피잔을 내려놓고 경기 분석이 한참 이어졌다.
국수전 제3국 취재로 중국 우한(武漢)에서 3박 4일 동안 본 윤 5단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침착하고 점잖은 청년이었다. 제3국을 패한 뒤 태연히 이 9단과 마주 앉아 복기를 하며 의견을 주고받고, 다른 일행과 카드게임을 즐기는 윤 5단을 보며 ‘나이가 어려 그런 걸까? 속이 깊은 걸까?’ 의아했다. “제3국 때 어떻게 그렇게 태연했죠?” “솔직히 끓죠. 하지만 속으로 넘겨요. 내가 잘못 둔 거니까….” 10년 넘게 바둑을 두어 온 국수의 공력일까.
그의 바둑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두터움’이다. 두텁게 두니까 더뎌 보이기도 하지만 두터움을 유지하면서 속력이 떨어지지 않는다. 균형 감각이 탁월하다는 평을 듣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제 20세. 지금까지 해 보지 못한 연애를 하고 싶은데 여자를 만날 기회가 없단다. “그럼 다른 기사들은 어디서 여자 친구를 만나죠?”라고 묻자 “알려 드리기 좀 그런데…”라고 뜸을 들인다. “소개팅도 많이 하고 이화여대에 바둑동아리가 있어 거기서 지도하다가 눈이 맞는 경우가 많다”며 “그런데 나를 끼워 줄지 모르겠다”고 웃었다.
이제 바둑에 입문한 지 12년차. “아무리 파도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 같아요. 공부를 할 때마다 계속 새로운 수가 보이니 신기하죠.”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