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황중환 기자
《“요즘 교수 사회의 화제인데 다들 쉬쉬한다. 워낙 일상화돼 있는 일이고, 창피하기도 하고….” 40대 중반의 한 교수는 19일 통화에서 본보가 14일부터 연재한 폴리페서(polifessor·정치교수) 시리즈에 대해 이렇게 말을 꺼냈다. 그에게 “교수들끼리 서로 반성하자는 얘기를 주고받은 것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이 교수는 “그런 의식이 있었다면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교수는 “폴리페서라는 한국적 현상이 나타난 것은 우리나라 권력 엘리트 충원 방식이 뭔가 왜곡돼도 한참 왜곡돼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교수출신 장관 비율 YS:16%→ DJ:14%→盧정부:19%
○ “정치 금단현상 안 겪어보면 몰라”
“기사 딸린 차를 타고, 전화도 비서가 걸어 주는 경험을 한 뒤 대학에 돌아와 교수 연구실에 혼자 앉았을 때 느끼는 고독감, 어두운 저녁 혼자 연구실 문을 닫고 나갈 때의 적막감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김대중(DJ) 정부 창출 과정부터 참여해 고위 공직을 맡았다가 대학으로 복귀한 A(경제학) 교수는 일종의 ‘정치 금단현상’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때 반짝 떴다가 인기가 하락한 연예인들이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마약을 하거나 자살을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한번 정치권에 발을 들여 놓은 폴리페서들이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이유가 바로 이런 금단현상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 선출직에 관심 보이는 교수 급증
한국 정치에서 폴리페서가 만연하기 시작한 것은 김영삼(YS) 정부 때부터라는 게 정치권과 학계 전문가들의 공통된 얘기다.
사실상 군사정부였던 노태우 정부까지는 교수들이 정권의 일방적인 ‘간택’을 받아 권력 주변부에 진입할 수 있었다. 정권 창출 과정에 직접 참여할 기회가 적었던 것. 이때 정권과 밀착한 교수들은 ‘어용 교수’라고 불렸다.
그런데 YS가 권력을 잡으면서 교수의 정치 참여 방식과 의식에 변화가 생겼다. YS는 문민정부라는 것을 부각시키려는 듯 적극적으로 교수들을 정부 요직에 기용했고 정치권에 끌어들였다. 교수들도 “군사정부가 아니다”는 논리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DJ 정부 들어서도 교수들은 ‘환대’를 받았다. DJ 정부 시절 전체 장관 91명 중 13명이 교수 출신이었다.
노무현 정부에선 지방대 교수 등 이른바 ‘외곽 교수’들이 대거 발탁됐다는 게 특징이다. 현 정부에선 우후죽순처럼 불어난 각종 위원회의 위원 자리 하나 못 맡으면 ‘무능한 교수’라는 자조가 나올 정도였다.
YS 정부 때 교수 출신의 장관은 17명으로 DJ, 노무현 정부(각각 13명)보다 많았다. 하지만 임명된 전체 장관 중 교수 출신이 차지하는 비율은 YS 정부 16.3%, DJ 정부 14.3%였다가 이번 노무현 정부 들어 19.4%로 늘었다.
국회의원 등 선출직에 관심을 보이는 교수가 급증했다는 사실도 주목할 대목이다. 17대 국회에 진출한 교수 출신 국회의원은 모두 26명으로 국회의원 10명 중 한 명꼴이다. 미국에선 국회의원 등 선출직은 ‘프로 정치인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국처럼 선출직에 나가려는 교수들은 거의 없다.
○ 폴리페서의 휴직, 사직 기준 분명해야
17대 국회에서 교수 출신 국회의원 26명 중 교수직을 내놓은 의원은 한나라당 김석준, 열린우리당 박찬석 의원 2명이고, 나머지는 휴직 중이다. 박 의원은 정년을 1년 남겨둔 상태에서 사직했다.
정부의 상근직에 나가는 교수들의 휴직 혹은 사직 문제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대의 한 교수는 정부직에 나갈 때 사직 문제로 소속 단과대학 교수들이 찬반 투표를 하는 사태까지 벌어진 적이 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 권영건(안동대 총장) 회장은 “선출직에 출마하려는 교수들은 사표를 내는 게 맞다”며 “대선후보 캠프에서 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법적으로 막을 방도가 없으므로 정 캠프에서 일을 하겠다면 반드시 휴직을 해서 다른 강사라도 충실히 강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 후진적 권력 엘리트 충원 구조
정당 정치가 일천하고 대학의 역사도 그리 길지 않은 한국에서 정치권력과 학자의 관계가 왜곡돼 있는 것이 폴리페서를 양산하고 있다는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교수를 국정 운영의 구색 맞추기용으로 이용하려는 권력과 신분 상승을 꾀하는 폴리페서의 ‘부적절한 공생’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미국에선 학자들이 현실 세계에서 자신의 뜻을 펴겠다는 ‘정책형 지식인’과 연구 및 강의에만 몰두하는 ‘학문형 지식인’으로 나뉜다. 정책형 지식인은 아예 워싱턴 주변의 싱크탱크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하며 정부나 정당에 정책 조언을 하고 이를 통해 행정부 관료들과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한 뒤 정부의 과장이나 국장 등 중간 간부로 실무 경험을 쌓아 가면서 장관 보좌관이나 차관보, 차관 등 단계적으로 승진해 나간다는 것.
한국외국어대 이정희 교수는 “미국에선 자기 이념에 따라 학자들이 민주당이나 공화당의 하부조직이나 싱크탱크에서 정책자문 역할을 하고 이를 통해 두각을 나타내면 정부 직에 기용돼 경험을 쌓을 기회를 얻는다”며 “우리나라는 (정당보다) 대선후보에만 목을 매고 있다”고 말했다.
중앙대 장훈 교수는 “대선후보에 줄을 댔다가 발탁되면 좋고, 아니면 교수를 계속하는 식으로 가면 책임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우리도 권력 엘리트 충원 과정을 제도화, 투명화, 실질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교육계 원로 김인회 한양대 초빙교수의 ‘쓴소리’▼
“학생에게까지 나쁜 물 들이지 말고 학교 떠나야”
“교수들이 힘을 모아 대학 경쟁력을 키우기에도 부족하다. 정치하고 싶은 교수는 정치판으로 들어가라!”
38년간 이화여대와 연세대 교육학과 교수로 한길을 걸어온 교육계의 원로 김인회(69·사진) 한양대 초빙교수가 19일 후배 교수들을 향해 쓴소리를 했다.
김 교수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폴리페서 출현 같은 한국적 현상을 개선하기 위해선 대학문화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리나라 대학은 교수도, 학생도 적당히 하면 된다는 잘못된 생각에 빠져 있다. 일부 교수는 조교 보고 논문 쓰라고 지시하기도 하고, ‘표절도 관행’이라는 이야기나 한다. 심지어 어떤 교수들은 출판사로부터 교재 채택 커미션을 받기도 한다.”
김 교수는 정치권을 기웃거리는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미칠 악영향을 우려했다. 그는 “정치적 활동이라는 게 단지 회의에 한두 번 참석하는 게 아니라 시간 뺏는 일이 많다”며 “일부 교수는 수업을 휴강하고 연구실에 ‘외부 회의 중’으로 붙인 뒤 근교 골프장에서 정치인과 골프 치는 일도 있다”고 비판했다.
김 교수는 “대학 문화가 정치적이다 보니 학생들도 잘못된 기성 정치에 물들어 대학 총학생회장 선거 때 부정부패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14일부터 본보가 연재한 폴리페서 시리즈에 깊은 공감을 표시하며 “동아일보에서 문제 제기를 한 만큼 여론이 형성돼 대학에 남아 있는 맑은 물들이 사회적 표상이 되면 교수사회 문화도 바뀌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끝으로 “대학교수에게 가장 중요한 건 명예와 자존심”이라며 교수사회 스스로의 자정운동을 촉구했다. “교수에게 명예와 자존심은 사회적 명성이나 지위, 정치적 출세, 많은 연봉이 아니라 자기 분야에서 쌓은 전문가로서의 업적과 학생과 동료교수 사회로부터 받는 존경심이다. 정치권이나 기웃거리는 것은 교수의 명예와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