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중에 봄을 제대로 느껴본 이가 얼마나 있을까.
바쁜 일상에 쫓기느라 동네 주변에서 어떤 꽃을 봤는지, 출퇴근 때 지나치는 길 위의 목련은 피었는지 도대체 기억이 없다. 하늘을 바라본 적이 언제였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봄을 느끼려고 새롭게 단장한 청계천을 찾지만 사람이 너무 많다.
짧은 점심시간에 사람에 밀리며 걷다 보면 사색과 여유는 어림도 없다.
내 몸 속 어딘가에 쿨쿨 잠들어 있는 봄을 깨워줄 ‘그 길’을 소개한다.》
# 낙산공원 길
대학로 바로 뒤편에 있지만 딴 세상 같은 곳이다. 아는 사람만 아는 명소다. 파리 몽마르트 언덕과 비슷한 해발 125m여서 ‘서울의 몽마르트’라 부르는 이들도 있다.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서 마로니에 공원을 거쳐 올라가면 15∼20분 거리다. 산의 능선을 따라 성곽이 정비돼 있다. 구불구불한 산책로를 따라가면 성곽과 크고 작은 지붕이 보인다. 부드러운 흙길이 매력적이다.
낙산의 절정은 일몰이다. 해가 서서히 떨어지며 도심을 붉게 물들이는 장면을 보노라면 서울의 몽마르트라는 표현을 실감하게 된다. 낮 시간과 일몰, 야경을 비교하는 것도 묘미다. 약간의 다리품을 팔아야 하지만 서울을 재발견하는 즐거움을 안겨 준다.
# 양재천 길
경기 과천시 관악산에서 발원해 탄천으로 유입되는 총 15.6km. 이곳은 강남의 빌딩 숲에서 자연을 만날 수 있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이 길의 묘미는 3가지 코스로 산책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우레탄이 깔린 푹신한 걷기 전용 길을 이용하는 것. 또 하나, 하천 바로 옆길을 따라가면 물고기와 수생식물 등 자연과 가까워진다.
마지막으로 도로 옆 둑길을 걸으면 분위기가 크게 달라진다. 영동 1∼6교의 도곡동, 대치동 길에는 가로수가 장관을 이룬다. 영동 1∼2교 구간은 예쁜 카페가 모여 있어 ‘양재천 카페 길’로 불린다.
이 길의 탁월한 장점은 인근에 시민의 숲이 있다는 것. 곳곳에 벤치가 설치돼 있어 휴식공간으로 제격이다.
# 북촌
종로구 가회동 31번지는 사진에 관심 있다면 한번 찾아갈 만한 곳이다. 90여 채의 한옥이 밀집돼 있다. 한옥의 맵시가 가장 예쁘게 드러나는 곳이다.
산책길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뉜다. 북촌문화센터에서 출발해 불교미술박물관→오죽공방→궁중음식연구원→가회박물관→표구공방으로 이어지는 예술문화공간 코스를 선택하면 1시간 반이면 둘러볼 수 있다. 가회동 일대 한옥체험 코스는 1시간 정도 걸린다.
옛 길의 특성상 골목과 오르막길이 많은데 혼자 걷다 보면 좀 썰렁해진다. 아무래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누군가와 함께 걷는 것이 좋다.
풍문여고→덕성여고→정독도서관→감사원의 직선형 코스도 괜찮다. 특히 풍문여고 옆길은 잘 뻗은 가로수 아래에 조명이 설치돼 있어 밤이 되면 낭만적인 거리로 변신한다.
# 정동 길
정동 길은 도심 속에서 드물게 낭만을 찾을 수 있는 길이다.
덕수궁 대한문에서 정동제일교회 입구까지 약 150m는 일방통행로다. 한쪽 보행로의 폭이 6m 이상이며 도로와 보도의 높이가 비슷하다. 산책로가 구불구불한 시골길처럼 이어져 길을 걷는 시각적 즐거움을 준다.
정동제일교회 앞에서 왼쪽은 미술관 길, 오른쪽은 정동극장으로 빠지는 길이다. 자연친화 분위기는 아니지만 오래된 건물과 예쁜 벽돌 블록의 조화가 매력적이다. 광화문에서 출발해 덕수궁 돌담을 끼고 정동 길을 거쳐 한바퀴 돌면 40∼50분 걸린다.
# 경희궁 길
광화문 네거리에서 서대문 방향으로 가다 보면 서울역사박물관이 나온다. 이곳에서 성곡미술관으로 가는 길에는 경희궁 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거리는 350m로 짧지만 역사박물관, 화봉 책 박물관, 성곡미술관으로 이어져 ‘문화 칼로리’가 높다. 화봉 책 박물관은 약 10만 점의 고서를 소장하고 있으며 30여 개 국에서 출판된 책 945종이 전시돼 있다. 성곡미술관에서는 조각공원으로 조성된 1000여 평의 정원을 목조 산책로를 따라가면서 둘러볼 수 있다.
# 화랑로
성북구 하월곡동에서 노원구 공릉동에 이르는 8.55km 구간. 가을 단풍과 낙엽의 거리로 유명하지만 봄에도 사색의 길로 손색이 없다. 길 양쪽에 커다란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어 연인과 손잡고 걷기에 좋다. 서울여대, 육군사관학교, 태강릉 등 둘러볼 곳도 많다.
육사 캠퍼스를 산책할 수도 있다. 개인 방문은 주말 3회이며 2, 3일 전 예약하면 된다. 육군박물관과 기념관, 야외무기 전시장이 있으며 요금은 1000∼2000원.
# 회기로
홍릉수목원에서 경희대 앞까지 이르는 길은 로맨틱하기로 유명하다. 1km 남짓한 짧은 거리지만 직선으로 펼쳐진 가로수가 일품이고 홍릉수목원, 세종대왕기념관, 영휘원을 끼고 있어 산책 코스로 적당하다. 경치가 좋기로 소문난 경희대 캠퍼스나 수목원에 들르는 것도 한 방법이다.
# 연세대 동문 길
행정구역은 서대문구 대신동이지만 흔히 ‘연대 동문 길’이라고 부른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신촌이나 이화여대 부근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수십 년 전부터 두 학교의 교수 사택이 모여 있어 학구적인 분위기가 형성돼 왔다.
봉원사 옆 연대 동문 왼쪽으로 골목길이 300m가량 이어진다. 양 옆으로 소문난 레스토랑과 카페가 있다.
# 효창공원 길
효창공원에서 숙명여대 쪽으로 뻗은 길이다. 차량과 사람이 적고 인근에 공원이 있어 깨끗한 공기 속에서 여유 있게 산책할 수 있다. 야간에는 주변이 어둡고 주차 차량이 많아 불편하기 때문에 낮 시간에 이용하는 것이 좋다. 숙명여대에서 효창공원 왼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선택하거나 공원을 가로지르며 산책한다.
# 숭실대 길
총신대에서 숭실대에 이르는 1200여 m. 숭실대 담장을 개방하고 주변에 벽천, 생태연못, 녹지대를 꾸몄다. 중간에 미니 폭포와 전시 공간이 있고 소나무 등 19종 1만여 그루가 심어져 있다. 캠퍼스 담장을 개방해 넓은 공간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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