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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북촌,그 골목길엔 사람의 향기가 있다

입력 | 2007-03-24 03:00:00

언어는 달라도 봄바람은 통한다. 프랑스 싱글 여성 클레르 세륄라즈 씨(오른쪽)와 본보 기자가 함께 북촌 한옥마을을 걸었다. 원대연 기자

논과 밭, 나무, 그리고 기찻길. 서울 구로구 항동 기찻길엔 봄바람이 가득하다. 사랑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연인인 클레르(왼쪽)와 이승윤 씨가 철로를 걷고 있다. 원대연 기자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는 말했다. 걷기는 세상,정신,몸 사이에 존재하는 삼각관계를 활발하게 한다고.

미국의 인류학자 조지프 A 아마토는 말했다. 걷기는 말하기라고.

다양한 걸음걸이는 그 사람의 신분을 말해 준다. 언제 어디를 누가 걷느냐에 따라 순례자가 됐다가 윈도쇼핑객이 되고,낭만적인 시인이 되기도 한다.

봄꽃이 피어나려고 에너지를 한껏 모은 3월. 햇볕이 기분 좋게 내리쬐는 일요일 오후에 두 여자가 한껏 멋을 내고 서울 거리로 나섰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발걸음이 마냥 가볍다.

이들의 걷기는 ‘봄바람’을 말한다. 두꺼운 코트를 벗어던지고,오들오들 떨던 거리를 누비는 둘의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 찼다. 봄바람은 국경도 뛰어넘는다.

두 사람의 언어는 다르지만 같이 걷는 것만으로도 뭔가 통하는 느낌이다.

프랑스 싱글 여성 클레르 세륄라즈(26)는 본보 기자와 함께 걸으면서 한국과 서울 거리,그리고 봄바람에 대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서울에 있지만 서울 같지 않은 거리를 거닐었다.

클레르는 작년 8월 한국에 와 주한 프랑스대사관에서 컴퓨터 네트워크 업무를 맡고 있다.

종로고 가회동을 중심으로 한 북촌 한옥마을에선 수백 년간 응축된 한국의 전통 문화를 느꼈다.

구로구 항동의 노근 기찻길에선 낭만을 만났다. 시골길을 걸으며 시를 썼다는 영국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스의 재능을 빌릴 수 있었다면 걸출한 작품이 하나쯤 나왔을 법한 분위기였다.》

○ 봄날을 걷다

“프랑스 여자들도 봄이 되면 ‘봄바람’이 나나요?”

“봄이 오면 여자들의 옷 색깔이 달라져요. 친한 사람끼리 노천 카페에 모여 봄을 누리죠. 그래서 남자들도 봄을 좋아해요. 여자들이 예뻐진다고. 남자들이 예쁘다고 시선을 보내면 여자들은 더 신나죠. 봄바람의 선순환이에요.”

흔히 프랑스 스타일을 가리켜 ‘프렌치 시크’라고 한다. 블랙 앤드 화이트를 기본으로 한 세련미를 지칭한다. 클레르가 그랬다.

그는 몸에 살짝 붙는 블랙 미니드레스에 블랙부츠, 네이비 트렌치코트 차림으로 나타났다. 모로코 여행 중에 샀다는 비둘기색 스카프가 멋스러웠다. 미니드레스에는 빨간색과 하얀색의 기하학적 무늬가 그려져 있어 1960년대 스타일을 느끼게 했다.

감기에 걸려 기침을 하면서도 미니드레스가 예쁘다는 말에 트렌치코트를 살짝 벗는다. 걷기 체험에 나섰으면서도 굳이 7cm 하이힐을 고집한 기자와 뭔가 통하는 것 같다.

서울에선 목적 없이 걷는다는 게 낯설다. 목적지 바로 앞에 내릴 수 있는 대중교통이 없거나 운동을 하려고 작심할 때나 걷는다. 오로지 걷기만을 위해 혼자 예쁜 거리를 찾아가는 건 왠지 외톨이 같아서 싫다.

조선시대의 한국뿐 아니라 몇 백 년 전의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에서도 여자 혼자 걷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에는 여성의 산책이 독립을 의미한다는 대목도 있지 않던가.

클레르는 한국인의 일하는 속도와 양에 놀랐고, 빨리빨리 걷는 모습에 또 한번 놀랐다고 했다. 사실 천천히 여유를 부리며 걸을 수 있는 건 특권이다. 여유가 있다는 건 지금 당장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1997년 미국 뉴욕에서는 시 당국이 교통체증을 줄이기 위해 자동차 중심의 교통정책을 펴자 보행권을 되찾자는 시민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뉴욕 시민은 자동차와의 힘겨루기 끝에 도시에서 마음껏 걸을 수 있는 특권을 차지했다.

서울도 바뀌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들은 걷고 싶은 거리를 조성하며 도시의 보행자를 응원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자주 걷곤 했는데 서울에선 그러지 못했어요. 인사동 거리를 걸어 본 정도지요. 어쨌든 잘 모르는 거리를 체험해 보는 건 신나는 일이에요.”

○ 서울의 재발견-북촌 한옥마을

정독도서관 앞 작은 카페에서 재스민 차를 마시고 종로구 가회동 한옥마을을 찾았다. 이곳은 종로의 윗동네라는 뜻으로 북촌(北村)이라고 불린다.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 사이에 있어 조선시대 왕족이나 고위 관리들이 살았다고 한다. 조선 말기에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이전의 대형 한옥 대신 어깨를 맞댄 촘촘한 한옥이 대거 들어섰다.

“역사가 오래된 유럽 도시에선 골목마다 과거의 흔적을 찾는 재미가 있어요. 규제가 심해서 빌딩을 마음대로 못 짓거든요. 서울에선 주로 압구정동이나 홍익대 앞을 다니다 보니 이렇게 언덕이 있고 좁은 길은 처음 만나요. 서울은 정말 큰 도시라는 점을 실감해요. 역사가 이렇게 긴 줄도 몰랐고….”

클레르는 학부에서 고고학을, 대학원에서는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다. 지금은 컴퓨터 관련 일을 하고 있지만 옛것에 대한 사랑이 뿌리처럼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한옥 지붕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말 아직도 사람이 사느냐”고 여러 번 물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서 서울 근무를 자원했어요. 프랑스에 26년 동안 살았는데 그곳에서만 계속 있어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세상은 넓으니 계속 새로운 걸 발견해가며 살고 싶었죠. 지금처럼.”

걷기는 발견의 연속이다. 서울에서 26년 살았고 매일 광화문 언저리를 돌아다녀도 실제 한옥 골목길을 걷는 건 처음이었다.

“4월에 엄마가 오는데 꼭 모시고 와야겠어요. 이런 데가 더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상하이나 도쿄에는 없고 서울에만 있는 길.”(클레르)

북촌 한옥마을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로 나와 계동 현대 사옥 골목으로 올라가면 나온다.

○ 낭만의 봄바람- 구로구 항동 기찻길

“버스는 영어 안내나 노선표가 없어서 도저히 탈 수가 없어요. 평소 가기 힘든 곳이라고 하니 기대가 크네요.”

교외의 풍미를 느낄 수 있는 곳에 간다고 하니 클레르는 마냥 신이 났다. 잘 알려진 지하철역 부근 외에는 찾아가기 힘들었다는 것. 한국인 남자친구까지 데리고 나왔다.

이럴 수가. 한국에 온 지 반 년이 약간 넘었을 뿐인데 벌써 멋진 남자친구가 있다니. 한국에서 20∼30년 살아도 화이트데이를 씁쓸하게 보낸 여자가 어디 한두 명인가.클레르는 화이트데이가 뭔지도 몰랐다고 한다.

“프랑스에선 안티 밸런타인데이족(族)이 절반은 돼요. 싱글은 선물을 못 받아서 열 받고, 커플은 선물이 눈에 안 차서 열 받고…. 사실 너무 상업적이잖아요.”

얘기를 하다 보니 구로구 항동 기찻길에 다다랐다. 지하철 7호선 천왕역에서 내려 동부제강 쪽으로 걸어가면 낡은 기찻길이 나온다.

이곳 기찻길 1km 구간은 하루에 한 번꼴로 열차가 다녀 한적하다. 철로로 다닐 수 있다. 주변의 논과 밭, 그리고 야산이 어우러져 누구나 상상해 본 시골의 이미지 그대로다. 풋풋한 흙냄새를 맡다 보면 먼 곳에 여행이라도 온 듯 상쾌해진다.

기찻길 옆에선 잡종개 한 마리가 기지개를 켜고, 주민들이 산책을 하고 있었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커플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와∼. 서울에서 가장 아쉬웠던 게 나무였어요. 자연에 가까운 곳이 그리웠는데 이런 데가 있네요. 고향엔 정말 나무가 많았거든요. 이제 곧 꽃도 피겠죠!”

‘시골길’을 걸을 땐 편한 신발이 최고다. 하이힐은 자갈밭, 진흙, 철길의 맛을 느끼지 못한다. 굽이 낮은 신발을 신고도 키가 큰 클레르가 부러웠다.

“원래 스니커즈류의 낮은 신발을 좋아해요. 걷기도 편하고, 키가 커서…. 그런데 한국에선 도저히 내 사이즈 신발을 못 찾겠더군요. 엄마가 신발 4켤레를 갖고 오기로 했어요.”

자연스럽게 클레르 커플이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철길은 좁아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걷기 어렵다. ‘봄바람 커플’에겐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여자는 철로 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가까스로 걷고, 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아주는 커플도 많았다.

“한국 남자요? 프랑스 남자보다 책임감이 강하고 자상해서 좋아요. 문자 주고받는 것도 재미있고. 한국에서 처음 맞는 봄을 혼자 보내지 않아서 얼마나 좋은지.”

비닐하우스와 논밭, 기찻길이 어우러진 항동에서 한참 얘기하다 헤어졌다. 다음 날 클레르가 보낸 e메일. “‘낭만적인(romantic)’ 시간을 선물해 줘서 고마워요.”

글=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21세기 보행자의 특권은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음악이 아닐까. 걸으면서 듣기 좋은 음악을 꼽아보면…

#홀로 봄을 걷다

☆ Carnival (카디건스·1995·사진)

☆ 봄이여 오라 (MC 스나이퍼·2007)

커플들이 짝을 이뤄 봄나들이를 즐기는 데 혼자라 외롭다고? 여기 온 세상 솔로들의 봄을 위로해 줄 노래가 있다. 스웨덴 출신 혼성 밴드인 카디건스의 ‘카니발’은 “그래도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고 솔로들에게 외치는 듯한 느낌. 그래도 외롭다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MC스나이퍼의 ‘봄이여 오라’를 들을 것. 일본 출신 여가수 마쓰토야 유미의 1994년 히트곡 ‘하루요, 고이’를 샘플링한 이 곡에 사랑과 인생 등 관조적인 가사를 담았으니.

#가족과 따뜻함을 걷다

☆ Ode to my family (더 크랜베리스·1995·사진)

☆ 피아노 (권진원·2006)

봄은 가족과 함께 하는 계절. 아일랜드 출신 4인조 혼성 록 밴드인 더 크랜베리스의 ‘Ode to my family’는 이들의 전성기 시절 발표된 발라드 곡으로 가족의 따뜻함을 일깨워 준다. 이 곡으로 가족의 고마움을 차분히 느낄 수 있다면 권진원의 ‘피아노’는 마치 봄나물이 땅을 뚫고 튀어 오르듯 생동감 있는 노래다.

#연인과 낭만을 걷다

☆ Fairy tales (윤상·2002)

☆ Heaven (존 레전드·2006·사진)

시원한 봄바람을 맞으며 연인과 데이트하고 싶다면? 새로 시작하는 연인들처럼 발랄한 음악으로 꾸미는 것이 좋다. 윤상의 ‘Fairy tales’는 그가 월드뮤직을 표방하며 만든 곡으로 봄나물을 먹는 듯 산뜻하다. 연인을 바라보다 눈이 침침해지면 푸른 하늘을 잠시 바라볼 것. 하늘을 노래하는 흑인 솔 뮤지션 존 레전드의 ‘헤븐’이 준비돼 있다.

#친구와 신나게 걷다

☆ Feelin’ so good (제니퍼 로페즈·1999·사진)

☆ Lullaby of broad way (토니 베넷&딕시 칙스·2006)

왁자지껄 봄나들이 나서는 친구들, 우정이 먼저냐, 봄이 먼저냐 떠들기 전에 음악으로 우정을 다져보는 건 어떨까. 산소를 마시는 것처럼 신선한 힙합곡 ‘필린 소 굿’은 라틴 팝스타 제니퍼 로페즈가 흑인 프로듀서 디디와 연인 시절 함께 만든 곡. 너무 들떠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다면 재즈 아티스트 토니 베넷의 80세 생일기념 앨범에 담긴 ‘Lullaby of broad way’에 귀를 기울이자.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