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높이 시설병원일까, 유치원 파티가 예정된 체육관일까.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 위치한 필라델피아 아동병원(CHOP)의 로비에 들어서면 어린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이 병원의 노력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 사진 제공 필라델피아 아동병원
재미있는 치료약품 냄새가 짙게 밴 병원에 들어서면 어린이 환자는 잔뜩 긴장하게 된다. 필라델피아 아동병원의 의사들은 “어린이들이 청진기와 주사 대신 흥미로운 다른 물건에 관심을 가질수록 진찰받는 고통은 줄어든다”고 말한다. 사진 제공 필라델피아 아동병원
《‘똑같이 불에 덴 상처도 아이의 여린 피부라면 상황이 다르다, 감기약이라도 어른의 약 절반 정도를 아이에게 먹이면 부작용이 있을 것이다….’ 아동병원은 작은 생명의 소중함, 어린아이의 고통에 관심을 두는 의사들이 만든 곳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아동병원에서 포근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반드시 5세 꼬마의 생일파티 같은 실내장식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151년 전통을 자랑하는 필라델피아 아동병원을 지난달 14일 찾았다. ‘어린이는 작은 어른이 아니다.’ 바로 이 병원의 모토다. 이 병원의 이름은 최우수병원 선정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첫머리에 오른다. 유에스뉴스 & 월드리포트가 4년째 최고의 아동병원으로 선정했고, 어린이 전문잡지 차일드도 올해 1월 이곳을 ‘최고’로 평가했다.》
수석 내과의인 앨런 코언 박사에게 비결을 물어봤다. 그는 “바로 다른 병원에서 못 하는 치료를 이곳에선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내 수준급 대형병원이 대개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선두주자로서 기초연구에 집중해야 한다는 병원 측의 의무감이 느껴졌다. 심장심실 기형치료를 위한 개흉(開胸) 수술, 미숙아 호흡기 관리를 비롯해 이 병원이 세계 최초로 시도한 치료 및 수술법은 셀 수 없이 많다고 병원 측은 설명했다.
수석 외과의인 스콧 애드직 박사는 홍보 영상물에서 “의학연구야말로 실낱같은 희망이다. 환자와 가족을 떠올린다면 할 수 있느냐보다 얼마나 빨리 치료 가능한 해법을 찾아내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가녀린 핏덩이를 산모가 봐야 하는 절박함을 덜고자 이 병원은 유전적 요인으로 생겨나는 천형(天刑) 같은 질병을 태어나기 전 엄마 배 속에서부터 고쳐주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연구 분야 책임자(chief science officer)인 필립 존슨 박사는 “몇 살짜리 환자가 있느냐”는 질문에 “마이너스 9개월에서 성인까지”라며 웃었다.
임신부를 초음파로 꼼꼼히 검사하면 태아의 척추 끝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 생긴 장애나 머리가 부풀면서 뇌가 손상되고 신경체계가 마비된 것을 찾아낼 수 있다. 존슨 박사는 “태어나자마자 수술을 하지만 앞으로는 태중에서 약물 등의 방식으로 치료하는 시술을 더 늘리려고 한다”고 했다.
인터뷰가 거듭될수록 ‘아이들이라서 다르고, 더욱 안타깝다’는 절박감이 인술을 펴는 의사들에게서 어김없이 확인됐다. 병원에서 운영 중인 통증 해소 프로그램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시작됐다.
병원장인 스티븐 알츠슐러 박사는 “안정적인 장기간의 치료를 위해 어린이가 학교 공부와 친구 사귀기 등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데 힘을 쏟는다”고 강조했다. 통증별로 체조동작이나 요가를 가르쳐 주며, 주기적인 통증 패턴에 따라 등교 가능한 날짜 지정까지 병원에서 결정해 준다.
세심한 심리안정이 필요한 어린이가 얼굴에 기형이 있다면 따돌림당하기 쉽다. 어린이 성형 프로그램은 이런 따뜻한 배려에서 출발했다.
2000년 중국에서 세 아이를 입양한 멀그루 씨 부부는 입양 결심 직전 남자 아기(미국이름 코너)의 입천장에 기형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들은 필라델피아 아동병원을 찾아가 입양 상담자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뒤 이 병원의 치료능력을 믿고 결심을 굳혔다.
병원에 따르면 이렇게 얼굴기형 치료를 받는 입양 대상 어린이가 연 30명 정도. 성형외과 전체로는 지난해에만 7600명이 두개골 손 화상부위 등을 치료받았다.
소아성형을 담당하는 한국계 김희경 박사는 “뇌성마비 어린이에게 보톡스 주사를 놓거나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운 아이들에게 발끝이 아닌 발바닥으로 걷도록 보조기구를 만들어 주는 기술에선 기공사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이런 노력에도 어린이가 세상을 떠나는 일은 계속된다. 수십만 명의 환자 가운데 매년 300명이 죽는다.
20년 경력의 수전 러스코스키 간호사는 “돌보던 아이들이 죽었을 때가 가장 힘들다. 그럴 때면 간호사들이 으레 모여 대화를 나눈다. 충격이 누구보다 크기 때문이다. ‘늘 아이(환자)들이 내 아이라면…’ 하는 생각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필라델피아=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모빌 장식… 자동차 침대… 태양빛 효과 조명
놀이터 같은 병원
아픈 주삿바늘, 쓰디쓴 약, 붕대를 감고 있거나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
병원이란 어린 환자들에게 이처럼 두려운 무언가를 연상시키기 마련이다. 필라델피아 아동병원에서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 어린이가 ‘마음까지 편안하게’ 병원에서 지낼 수 있게 해 놓아 눈에 띄었다.
본관 1층의 20m 높이의 뻥 뚫린 천장이 인상적인 로비(아트리움)는 초등학생 생일잔치 장식물을 연상케 하는 모빌 인형 모형물이 걸려 있었다. 호기심 많은 어린이 환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한 배려다.
응급환자가 밀어닥치는 응급실을 찾았다. 도시 전체에 눈보라가 불어 닥친 이날은 북새통 같아야 할 응급실도 한산했다. 한쪽 구석에서 유모차 크기의 빨간색 플라스틱 모형 자동차가 눈에 띄었다. 응급실 담당의인 니컬러스 차로하스 박사는 “응급실 침대와 수술실에서 휠체어나 바퀴 달린 침대 대신 사용된다”고 말했다. 어린 환자가 친숙하게 느끼도록 하자는 뜻에서다.
집중치료실(ICU)에선 조명의 밝기가 태양빛의 움직임에 맞춰지게 했다. 해 뜨는 시간에 맞춰 간접조명이 켜지고, 한낮과 해질 무렵의 실내조명은 자연광의 밝기를 흉내 낸다. 갓 태어난 아이가 자연에 더 가까운 환경에서 치료받도록 하려는 마음 씀씀이가 눈길을 끌었다.
입맛이 까다로운 어린이를 위한 ‘호텔식 룸서비스’ 제도도 지난해 시작됐다. 무미건조한 이미지의 병원식사 대신에 팬케이크 과일 샐러드 등 무엇이나 전화로 주문할 수 있다. 환자의 상태에 따라 체크된 음식이 정확히 45분 뒤 입원실 침대로 배달된다. “어린이 환자 모임에서 제안했고 병원이 흔쾌히 동의했다”고 홍보담당자인 조이 매쿨 씨는 설명했다.
시설 장비 음식 이외에 간호사의 일상 근무에서도 세심한 배려가 묻어났다.
병원에선 퇴원 후 몇 년 뒤 가족들의 연례 방문행사가 열린다. 죽음을 견뎌낸 뒤 성장한 어린이들은 절체절명의 시간을 같이 보낸 간호사에 대한 기억을 잊기 십상이다.
그러나 간호사 20년차인 수전 러스코스키 씨는 “몰라봐서 섭섭한 게 아니라, 오히려 다행스럽다”고 했다. 2, 3세 어린이의 고통스러운 입원생활을 잊는 게 건강한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뜻이었다.
필라델피아=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