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인천 M 초교 박모(8)군의 자리에 조화가 놓여 있다. 박군은 유괴 4일만에 숨진 채 발견됐다.[연합]
송도 거리와 초등학교 담장 곳곳에 서 있는 입간판.
[현장 취재] 초등생 유괴·살인 사건 현장, ‘송도’에 가다
“너무 살벌해요.” “불안해서 살겠어요?” “송도는 말이 국제도시지 치안부재 도시예요. 이번 사건은 시작에 불과해요. 또 일어날 겁니다.”
박모 군(초등학교 2년)의 유괴·살인 사건이 일어난 지 18일째인 29일 오후 인천 송도국제도시를 찾았다. 전날의 험상궂은 날씨가 이어지는지 봄날 같지 않게 찬바람이 불고 먹구름이 짙게 드리웠다.
송도에 두 개 뿐인 초등학교, S와 M이 아파트 단지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박 군이 다녔던 M초등학교를 먼저 찾았다. 운동장에선 아이들이 체육 수업을 받고 있었다. 줄넘기를 하거나 공을 차는 아이들 얼굴이 해맑다. ‘유괴·살인’의 험악한 그림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학교 정문 옆에 서있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범죄예방…경찰은 3분 거리에’라는 문구가 도드라진다. 같은 글귀의 간판이 학교 담장과 거리 곳곳에 서있다. 한 학부모에게 “정말 경찰이 3분 이내에 출동할까요”라고 말을 건넸더니, “가장 가까운 연수경찰서도 승용차로 10분이나 걸리는데, 무슨 소리냐. 제발 ‘보여주기’식 행정은 그만하고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해줬으면 좋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유괴범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학부모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삽시간에 학교 앞은 수십 명의 학부모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대부분 인근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학원 차량도 길게 늘어섰다. 이내 한 무리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나왔다. 학부모들은 저마다 자기 아이들을 품에 보듬어 안으며 반겼다.
학부모들 틈에 끼여 최근 일어났던 ‘박 군 유괴·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그들은 누군가 물어주기를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유괴범에 대한 처벌이 솜방망이에 불과하다.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 15년이 지나면 처벌할 수 없다는 ‘공소시효’도 없애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 주부는 아직도 분이 삭지 않는지 격한 발언을 토해내기도 했다.
“처음 사건이 알려졌을 때 학부모들 사이에선 ‘유괴범을 막대기에 꿰어 구청 앞에 세워놓고 하루하루 고통을 가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어요. 그런 잔인무도한 사람에겐 사형도 관대한 처벌이라는 말이죠.”
b>“이번 사건은 시작에 불과, 또 일어날 것”
유괴범에 대한 격앙된 반응은 ‘송도’가 직면한 현실에의 우려와 성토로 이어졌다.
인근에서 음식점을 운영한다는 최인기 씨(45)는“송도는 말로만 국제도시지 치안부재 도시다. 파출소도 하나 없다. 경찰차만 때때로 순찰을 돌 뿐”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번 사건은 시작에 불과해요. 또 일어날 겁니다. 밤에 한번 와보세요. 완전히 암흑천지예요. 사건이 있고나서부터는 밤이 되면 거리에 사람이 없어요. 아이들은 절대 집밖으로 안 나와요.”
최 씨의 아내도 거들고 나섰다.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과 고 1인 딸이 있어요. 아들은 밤이면 ‘무섭다. 언제 들어오느냐’며 전화를 해요. 마음이 안 놓여서 장사도 제대로 못할 지경이에요. 그리고 딸에겐 밤에 산책도 하지 말라고 해요. 이러니 불안해서 살겠어요?”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을 둔 맞벌이 부부 최민진 씨(35)의 사연은 애처로울 정도였다.
“사건이 있기 전엔 학교 수업이 끝나는 시간, 학원에 도착하는 시간 등 아이가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시간에 맞춰 꼬박꼬박 전화를 했어요. 그런데 사건이 일어난 후부턴 제가 직접 등하교 시간에 맞춰 아이를 데려다주고 마중 나와요. 학원 끝나는 시간에도 데리러 가고요. 마음이 안 놓여서요.”
그는“업무 시간에 자리를 비우는 게 쉽지 않다. 오래 하진 못할 것 같다. 정말 학부모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놓고 직장에서 마음 편히 일할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해줬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너무 살벌하다”
S초등학교 앞도 마찬가지다. 하교 시간이 되자 정문 앞에 젊은 주부와 할머니들이 길게 늘어섰다.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을 둔 조수연 씨(38)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이처럼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사건이 터진 뒤부터 학생 수보다 학부형 수가 오히려 더 많을 때도 있다”며 “너무 살벌해졌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3학년 딸을 둔 박정희 씨(35)는 “유괴범이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다”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최근 2년 사이에 집값과 땅값이 2~4억 가까이 올라서 부자들이 많이 사는 줄 알고 유괴를 하는 것 같은데 절대 안 그래요. 이곳에 사는 사람들 태반이 전·월세예요. 집주인들은 거의 서울에 살아요.”
“경찰관 13명 상주하는 파출소 생기고, 지역민과 자율방법대도 조직할 것”
‘치안부재 도시’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송도. 사건 이후 학무모의 우려를 불식할 만한 대책은 마련되고 있는 것일까.
M초등학교 이재창 교감은 “수업시간에 각 학년 수준에 맞게 ‘유괴 대처 요령’을 교육시켰다. 각 가정에도 ‘가정에서 부모가 유괴와 관련해 자녀를 잘 지도해 달라’는 가정통신문을 보냈다. ‘학교폭력대책위원회’도 가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수경찰서 윤호연 경장은 “그동안 송도엔 경찰서가 없었는데, 이달 30일 경찰관 13명이 상주하는 파출소가 개소돼 치안을 본격적으로 전담하게 된다. 또한 아파트 부녀회나 지역민과 함께 자율방범대를 조직해 민관이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순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내 자식만 괜찮으면 된다는 이기심…안타깝다”
오후 4시가 지나자 구름이 더욱 낮게 드리워지며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졌다. 비라도 뿌릴 듯했다. 택시를 타고 인근 전철역으로 이동하는 중 유괴범이 박 군을 익사시켰다는 저수지를 지났다. 아파트 단지와는 지척이다. 차창을 통해 검푸른 물결이 보인다. 순간 S초등학교 앞에서 손녀를 기다리던 한 할머니의 탄식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옛날에 비해 인심이 너무 각박해졌어. 내 자식만 괜찮으면 된다는 이기심이 팽배해져서 남의 자식에겐 관심도 안 가져. 이웃 아이가 어떻게 되든 그저 자기 자식만 챙겨, 신경도 안 쓴단 말이지. 이번 사건도 며칠만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금방 잊혀질거야. ‘정’을 가지고 서로 내자식 처럼 챙겨주면 이런 일이 없을텐데, 안타까워….”
*인터뷰에 응해준 학부모와 교감 선생님은 가명으로 처리했음을 밝힙니다.
김승훈 동아닷컴 기자 h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