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편이나 한 감독답게 세월의 연륜이 담겨 있어야 할텐데 쉽지 않네요. 무사히 영화를 완성했다는 것만으로도 전 소임을 다했다고 봅니다."
대한민국 대표감독이란 수식어가 무색하게 일흔이 넘은 거장의 바람은 너무나 소박했다.
한국영화의 산증인 임권택 감독의 통산 100째 영화 '천년학'(제작 KINO2)이 3일 오후2시 서울 종로 서울극장에서 시사회를 열고 세상 위로 고요히 날아올랐다.
이청준 작가의 '선학동 나그네'를 바탕으로 한 '천년학'은 소리꾼 양아버지 밑에서 소리와 북장단을 나눠 배운 의붓남매 '송화'(오정해)와 '동호'(조재현)의 굴곡진 삶과 사랑을 담았다.
판소리를 소재로 삼았고 주인공이 동일인물이라는 점에서 '서편제'와 닮아 있지만 '천년학'은 소리로 승화된 한을 그린 '서편제'와 달리 소리에 녹아든 아련한 사랑 이야기를 스크린에 옮겼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서편제'의 아류라고 평가 받으면 실패다"
임 감독은 "100이라는 숫자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가볍게 넘어가려 했는데 주변에서 자꾸 말하니 나도 모르게 의식하게 됐다"며 "사실 99번이나 98번이나 내겐 다 비슷하다. 하지만 일을 계속 해나가야 하니 그런 시선이 사람을 부담스럽게 만든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어 "그렇다고 해서 100번을 건너뛸 수는 없기에 100번째 영화를 무사히 끝내는 게 가장 큰 소망이었다"면서 "100편이나 한 감독답게 영화에 세월이나 나이가 묻어났길 바라는데 그게 쉽지 않다. 제게 기대를 거는 분들께 이렇게 무사히 완성했다고 보여드린 것만으로도 제 소임은 다했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임 감독은 또 "'천년학'에는 순수하고 영원한 사랑 이야기에 한국인들의 풍요로움과 흥, 맛스러움을 함께 담고 싶었다"며 "오늘 영화를 보니 총체적인 느낌이 커다란 한국화를 그린 것 같다. 부디 관객들도 그렇게 봐주셨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서편제'가 한을 노래로 승화시켰다면 '천년학'은 소리로 전해지는 사랑"이라고 밝힌 임 감독은 "'서편제'의 아류라는 평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난 실패한 거다. '서편제'에 이어 판소리가 지배적이라는 인상을 털어내기 위해 재일교포 양방언 음악 감독을 기용하며 변화를 줬다"고 강조했다.
"스크린쿼터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다"
이날 임 감독은 충무로의 '어르신' 답게 현재 한국영화의 위기에 대한 안타까움과 더불어 뼈있는 조언도 주저하지 않았다.
임 감독은 "스크린쿼터라는 보호막 때문에 지금껏 감독을 할수 있었다"면서 "그간 내 영화들은 흥행시킬 만한 흥미로운 주제가 아니었지만 스크린쿼터가 있어 극장에서 상영됐고 지금껏 내가 여기까지 올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스크린쿼터가 반으로 줄어들었으니 이제 미국 등 외국의 대형 배급사들이 국내 시장을 주도하게 될 겁니다. 그러면 성수기에 맞춰 개봉하는 외화들 때문에 한국영화는 안좋은 시기에만 상영됩니다. 그런 추세가 가시화됐고 이렇게 해서는 한국영화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임 감독은 "투자사도 많이 빠져나갔고 한국영화를 지켜주는 보호막이 사라진다는 것은 무척 위급한 상황"이라며 "결국 영화를 잘 만드는 방법 외에는 방도가 없다"며 '내실을 다지자'고 힘주어 말했다.
"매컷마다 혼신의 힘을 다해 한치의 소홀함도 없는 결과가 탄생했다"는 임 감독은 "곱게 봐달라"는 작은 당부를 끝으로 남겼다. 과연 자극적이고 성미 급한 요즘 '패스트푸드 세대'의 입맛에 오래 참고 견디는 전통적인 '인(忍)의 정서'가 통할 수 있을지는 오는 12일 판가름 난다.
[화보]임권택 감독 100번째 영화 ‘천년학’ 촬영현장
이지영 스포츠동아 기자 garumi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