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 신시가지가 생기면 본래 도심이었던 지역은 퇴색하는 일이 많다. 대전도 마찬가지다. 동구와 중구 등 원도심은 개발의 뒷전에 밀려 흔히 한물 간 곳, 심지어 버려진 거리로까지 간주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곳 역시 치열한 삶의 현장이며 특별한 멋과 맛, 그리고 재미가 넘친다. 특히 신시가지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대전 사람들’만의 정서와 추억이 깃든 장소가 적지 않다. 가볼 만한 원도심의 명소를 소개한다. 아울러 원도심을 신도심과는 다르게 발전시켜 나갈 방안은 없는지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정말 세월의 무게와 추억을 느끼게 해 주는 노래죠….”
2일 오후 7시경 대전 중구 오류동 서대전역 맞은편의 음악카페 ‘전기줄 위의 참새’. 1970년대 가수 박건의 노래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이 흐르자 DJ 최평근(47·대표) 씨가 멘트를 시작했다.
뮤직박스와 LP판, 턴테이블, 음악신청 메모지, 담배연기…. 아련한 추억 속의 음악다방 풍경은 이곳에서는 아직도 현실이다.
이 음악카페는 1999년 중구 대흥동 훼밀리호텔 인근에 처음 문을 열었으나 지난해 4월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중학교 때부터 음악에 푹 빠졌다는 최 씨는 1979년 고교를 졸업한 뒤 음악다방인 대전의 은모래 및 르네상스에서 DJ로 명성을 날렸다. 또 1980년대 초와 90년대 말에는 대전KBS와 교통방송에서 6년 동안 DJ 겸 음악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그의 재산목록 1호는 LP판 1만5000여 장. 이 밖에도 팝송과 클래식, 재즈, 가요, 경음악 등을 망라한 CD가 6000여 장, 뮤직DVD도 1000여 장에 달해 방송국에서 음반을 빌리러 올 정도다.
오랜 고객인 최병운(39·건축인테리어) 씨는 “랩 같은 최신곡을 제외하고 신청 음악을 못 틀어 주는 ‘사고’는 한 달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하다”고 말했다.
‘빗속의 여인’이 실린 ‘ADD4’(1964년) 등 신중현 씨 데뷔 초창기 앨범(LP판)은 애장품 가운데 하나. 최 씨는 명곡 LP판을 틀어 줄 때는 재킷을 뮤직박스에 보란 듯이 내건다.
이곳에는 종종 최 씨와 친분이 있는 유명 가수와 연주자 등이 “귀 청소를 하고 싶다”며 찾는다. 오디오가 아직도 아날로그이기 때문.
디지털을 얕은 개울물에, 아날로그를 깊은 강물에 비유하는 최 씨는 “앰프(2대)는 1950년대 제작된 매킨토시 C-8, 스피커(4개)는 1960년대에 주문 제작한 클립시 라스칼라”라며 “진공관(20개) 교체비만도 3개월에 100만 원씩 들지만 자연음에 가까워 이 오디오를 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최 씨가 기르는 애완견 ‘소피’도 이 집의 명물이다. 단골손님이 오면 반갑게 맞이하고 음악신청 메모지를 물어다 전해 준다.
이 집의 최다 신청곡은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 국내 가요 중에서는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과 ‘백만송이 장미’를 많이 찾는다.
분위기가 고조되면 카페는 종종 디스코장으로 변한다. 옛날에 한가락 했던 손님들이 뮤직박스 앞으로 나와 고고, 트위스트, 펑키 실력을 자랑하기 때문.
“남화영의 ‘사랑과 이별의 세계’ 신청해 주셨네요. 1987년 곡인데 가게 문을 연 지 9년 만에 처음 신청받아 봅니다. 김인순의 ‘우리들의 푸른 교실’도 요즘 듣기 힘들죠….”
음악 마니아들이 하나 둘 테이블을 채워 나갔다. 또 하루의 ‘음악축제’는 이렇게 무르익고 있었다.
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 대전 원도심 지역 중 신도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멋이나 맛, 재미로 소개할 만한 곳이 있으면 제보(mhjee@donga.com) 바랍니다. 이 시리즈는 매주 수, 목요일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