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은 근거 없는 낭설에서 시작됐다.
2개월 앞서 발생한 러시아 소년 살인 사건이 “유대인의 소행일지 모른다”고 한 신문이 넌지시 암시하자 다른 신문은 이를 받아 “유대인은 유월절에 먹는 무교병(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빵)을 만드는 데 기독교도 소년의 피를 이용한다”고 주장했다.
1903년 4월 6일 제정 러시아의 키시네프(오늘날 몰도바의 수도) 도심은 피로 얼룩졌다. 20세기 들어 국가 권력이 주도 또는 방조한 첫 유대인 학살로 기록되는 ‘키시네프 포그롬(pogrom·반유대인 폭동)’은 이렇게 시작됐다.
사흘 동안 폭동이 계속돼 유대인 49명이 죽고 수백 명이 다쳤다. 가옥 700여 채가 파괴되고 약탈당했다. 러시아 소년 살인사건 용의자는 소년의 친척이 분명했지만 이성적으로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을 넘어섰다.
뉴욕타임스는 이렇게 묘사했다.
“폭도들의 리더는 사제였다. 시내엔 ‘유대인을 죽여라’라는 함성이 가득했다. 유대인들은 양처럼 살육당했다. 피에 굶주린 폭도들은 갓난아기를 갈가리 찢어 죽였다. 경찰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석양의 거리는 시체들과 다친 사람들로 가득했다.”
포그롬은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약탈과 파괴, 학살’을 뜻하는 러시아어. 1881년 황제 알렉산드르 2세 암살사건 공모자 중에 유대인이 한 명 끼어 있다는 이유로 시작된 포그롬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유대인들을 몸서리쳐지는 공포에 떨게 한 단어였다.
특히 키시네프 포그롬의 여파는 컸다. 그동안 침묵을 지켜 오던 레프 톨스토이, 막심 고리키 등 많은 러시아 지식인이 정부를 비난하고 나섰고 미국인들은 러시아 황제에게 집단 청원서를 보냈다.
이 사건은 유대인 시온주의에도 전환점이 됐다. 수만 명이 러시아를 떠나 서유럽과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고 러시아 내의 시온주의 운동가들은 무장 자위조직을 만들어 방어에 나섰다. 나아가 많은 유대인이 동족 니콜라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혁명 대열에 참여했다.
그러나 광란의 포그롬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나치 독일은 러시아 혁명에 유대인 지도자가 대거 참여한 것을 두고 ‘유대 볼셰비즘’이란 이름을 붙였으며 반유대주의를 국가 정책으로 공식화해 역사상 최대인 독일판 포그롬 ‘홀로코스트’를 실행에 옮겼다.
오늘날 포그롬은 유대인만이 아닌 소수세력 탄압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가 됐다. 1923년 간토(關東)대지진 직후 조선인 학살,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7년 난징(南京)대학살 등 제국주의 일본판 포그롬도 예외는 아니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