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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전 50년]한수 한수 반세기… ‘반상의 꽃’이 되다

입력 | 2007-04-09 03:04:00

1994년 제38기 국수전에서 당시 이창호 국수(왼쪽)와 도전자 조훈현 9단이 벌였던 제1국. 참관인으로 조남철 9단(뒤 오른쪽)이 참석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국수(國手)라는 칭호는 우리 바둑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칭호다. 그동안 세계 대회도 많이 신설됐지만 프로들은 여전히 국수라고 불리기를 가장 원한다.”(조훈현 9단)

한국 바둑계의 최고수를 가리는 국수전이 올해 50주년을 맞는다.

본사 주최로 1956년 4월 15일 ‘국수 제1위전’이라는 이름으로 첫 예선전이 열린 이래 반세기 동안 국수에 오른 이는 10명. 조남철(2006년 작고) 국수가 1956∼1964년 9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뒤 김인 윤기현 하찬석 조훈현 서봉수 이창호 루이나이웨이 최철한 윤준상 국수가 탄생했다.

조훈현 국수는 1976∼1986년 10연패를 포함해 16차례 정상에 올라 최다를 기록했다. 이창호 국수는 5연패와 더불어 9차례, 김인 국수는 6차례 정상에 올랐다.

국수전은 한국 최고의 기사들이 써 내려간 한국 바둑의 역사였다. 김인 9단은 “국수는 당대 최고의 타이틀을 뜻한다”며 “훌륭한 기사들이 국수전을 통해 바둑사를 새로 써 왔는데 앞으로 이런 흐름이 잘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창호 9단은 “국수전은 바둑인으로서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한국 프로바둑의 시작

조남철 국수의 생전 회고(월간바둑 2006년 7월호)에 따르면 국수전의 시작은 이렇다.

“1950년 한국기원이 발족한 뒤 당시 동아일보와 의논해 연승전을 시작했는데, 한 바퀴 도니까 뒤를 이을 사람이 없어 국수전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프로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고 대다수 노(老)국수들을 젖혀 놓을 수 없어 국수전이라는 이름 대신 ‘국수 일위전’이라고 했다. 국수 중 1위라는 얘기다.”

국수전은 팬들의 호응을 이끌어 내며 한국 프로바둑을 성공리에 안착시켰다. 본보가 1957년 제2기 국수전에서 ‘백지 기보’를 게재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라디오에서 실황 중계하는 국수전의 기보를 팬들이 직접 기록하도록 해 장안의 화제가 됐다.

조남철 국수는 생전에 “국수전의 인기는 대단했다. 기보 게재 여부에 따라 부수가 5만 부 이상 차이 난다고 바둑 담당 기자가 말했다”고 회고했다.

○한국 바둑 신기록의 산실

국수전 반세기는 한국 바둑의 기록 그 자체였다. 조남철 국수는 첫 대회에서 전승 기록을 세웠고 이후 1인 독주 시대를 달렸다.

1962년 제6기 국수전 도전기에서 패배한 김인 4단은 실력 부족을 절감하며 일본 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돌아온 그는 1965년 조남철 국수를 3-1로 누르고 타이틀을 땄으며 이후 국수전 6연패 및 아직도 깨지지 않은 한 해 최고 승률(90%·1965년) 기록을 세웠다.

1976년 조훈현 5단은 23세의 나이로 국수에 올랐다. 냉혹한 ‘검투사’로 불렸던 그는 국수전 10연패의 대기록을 세웠다.

조훈현 9단은 1990년 15세 소년이던 내제자 이창호 4단에게 무너졌다. 이 4단은 최연소 국수기록을 새로 세웠다. 이를 “너무 빠른 대혁명을 보는 우리 바둑계의 슬픔이냐…”고 묘사한 ‘월간바둑’의 표제가 바둑계의 충격을 대변한다. 당시 결과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조 9단은 10여 분간 줄담배를 피우다 복기를 마치지 않고 자리를 일어났다.

조 9단에 대한 서봉수 9단의 ‘6전 7기’도 빼놓을 수 없는 기록. 조훈현 10년 천하에 유일한 맞수였던 서 9단은 7번의 도전 끝에 국수에 올랐다. 다른 국수와 달리 일본에서 공부한 적이 없는 ‘토종 국수’인 서 9단은 “말할 수 없이 기뻤다. 너무나 하고 싶었던 국수를 따고 나니까 어찌나 정신이 없던지 지금도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고 말했다.

1993년 제37기 대회에선 ‘선상 대국’이 펼쳐졌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볼가 강의 유람선 알렉산드르호에서 제1국이 열렸다. 당시 도전자였던 이창호 9단이 조훈현 국수에게 이겼다.

○첫 여류 국수의 탄생

중국 출신의 여류 기사 루이나이웨이가 조 9단을 물리치고 2000년 국수에 올랐다. 외국인 여류 국수의 탄생이었다. 중국 신화통신은 이에 대해 “루이나이웨이, 한국 국수 타이틀 획득”이라며 “국수전은 동아일보사가 개최하는 한국 최고 수준의 기전”이라고 소개했다.

이후 조 9단이 다시 가져온 타이틀은 이창호 최철한 이창호 9단을 거쳐 윤준상 5단에게 갔다. 특히 올해 윤준상 5단은 도전기에서 이창호 9단을 누르고 정상에 올라 신예 국수 시대를 알렸다.

○국수전 명승부 3

역대 국수전 중 ‘1966년 조남철 대 김인’, ‘1987년 서봉수 대 조훈현’, ‘1990년 조훈현 대 이창호’의 대국이 명승부로 손꼽힌다. 1966년 대국은 김인 5단이 ‘영원한 국수’로 불리던 조남철 9단의 10연패를 저지한 승부였다. 서봉수 9단은 1987년 대국에서 조훈현 국수를 물리쳐 화제를 낳았다. 1990년 대국은 이창호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대국이었다. 이창호 4단은 스승 조훈현 9단에게 예상과 달리 3-0으로 완승을 거뒀다. 이 4단은 이후 2년간 스승에게 국수 타이틀을 내줬으나 1993∼1997년 다시 정상을 달렸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