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동구 원동 동구청 정문 앞길은 50여 년 전통의 헌책방 거리. 종로, 부여, 고려당, 영창, 박문각, 대광, 청양 등 10여 개 서점이 늘어서 있다.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고를 수 있는 대형 신간 서점과는 달리 다소 거칠고 투박해 보인다. 하지만 일단 들어서면 책방 주인의 세심한 배려와 서비스가 기다리고 있다. 이들 서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곳은 장세철(73) 씨가 1969년 문을 연 ‘고려당 서점’. 크기는 6평으로 골방 수준인데 책은 5만여 권이나 된다.》
매일 들락날락하는 도서지만 이들은 모두 장 씨의 머릿속에 있다. 중고교 및 대학 교과서와 참고서, 각종 사전류, 문학작품, 인문 사회 자연과학 서적, 실용서 등 온갖 장르의 서적이 멋대로 여기저기 쌓여 있는 것 같지만 고객이 책 제목을 말하기 무섭게 거의 반사적으로 찾아낸다.
9일 오후 어머니와 함께 참고서를 사기 위해 서점을 찾은 여중생이 “D출판사 2학년 영어 자습서를 달라”고 하자 장 씨는 “저자의 성이 ‘장’이여 ‘김’이여”라고 되묻는다. 여중생이 머뭇거리자 그는 학교 이름을 물어 자습서를 찾아 준다.
D출판사 중학교 영어 교과서가 두 종류이고 학교마다 어떤 교과서를 채택하고 있는지 알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장 씨는 “그 책요?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말하는 것을 가장 수치스럽게 여긴다. 이 때문에 신문과 인터넷을 통해 매일 쏟아져 나오는 신간과 ‘○○○ 선정 도서 100선’ 등을 기억해 둔다.
장 씨는 충남대 국어과를 졸업하고 잠시 교사 생활을 하다 헌책방을 차렸다. 당시 월급은 쌀 한 가마니 수준으로 자신은 그럭저럭 살 수 있었지만 동생들을 가르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헌책방을 차리려면 고서적을 찾는 교수들과 친분이 있고 한자를 많이 알아야 했다. 그는 “임진왜란 이전과 이후의 서적을 식별해 낼 수 있는 책방 주인은 많지 않을 것”이라며 “헌책방이 생계수단이기는 하지만 흩어진 문헌이나 자료를 연구자에게 제공한다는 사명감이 없으면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헌책방에는 인정이 있다. 장 씨는 검정고시나 방송통신대 교재를 찾는 사람에게는 종종 돈을 받지 않는다. 어렵게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면 돕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가끔 이렇게 공짜로 책을 가져간 사람들이 뒷날 찾아와 인사를 하면 뿌듯해진다”고 말했다.
얼마 전 중구 선화동 중앙로 지하상가 주변의 대훈서적이 둔산동 시청 주변으로 이전했다. 이에 앞서 은행동의 계룡서적도 둔산점을 개점했다.
이처럼 서점도 신도심 시대가 열리고 있지만 헌책방만의 유용성과 함께 추억과 정겨움을 잊지 못해 헌책방을 찾는 이들도 끊이지 않는다.
“원동 헌책방 골목을 찾은 지 벌써 수십 년 됐어요. 1950, 60년대 초간본이나 귀중한 고서, 비매품 서적 등이 적지 않죠. 이 골목에서는 푸근함이 느껴져요. 값을 잘 깎진 않지만 흥정도 가능해요. 그분들(서점 주인), 기분나면 이렇게 말해요. ‘그래 알았어. 오늘은 그냥 가져가’라고….”(민속학자 강성복 씨)
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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