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의 패션쇼는 15분 남짓 걸린다. 40여 벌의 옷이 무대에 등장하고 이를 평균 1500여 명의 관객이 지켜본다.
옷이 마음에 들건 들지 않건, 디자이너가 인사를 하러 무대로 나오면 모두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 고작 15분의 감동을 위해 3, 4개월을 가슴 졸이며 보냈을 디자이너의 수고에 대한 격려의 표현이다.
지난달 28일부터 5일까지 서울 강남구 대치동 서울무역전시장(STEC)에서 국내 최대 패션행사인 서울컬렉션이 열렸다. 정상급 디자이너 48명이 꾸민 ‘15분’의 감동이 모여 올가을과 겨울 패션의 흐름을 제시했다.
올가을과 겨울은 지난해에 이어 미니멀리즘(장식을 최소화한 패션)이 대세를 이룰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컬렉션에선 간결한 실루엣과 고급스러운 디테일, 과거와 미래, 남성과 여성 등 상반된 이미지가 어우러진 패션이 대거 선보였다.
각 디자이너의 개성이 돋보인 것도 올해 서울컬렉션의 특징. 특히 올해는 남성복과 여성복 일정이 분리되고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브랜드가 컬렉션에 참여하는 등 외견상으로도 한층 풍성한 내용으로 꾸며졌다. 일반 관객도 늘어나 좌석이 없어 서서 관람하는 사람이 전체의 절반을 넘을 정도였다.
파리 밀라노 뉴욕 런던에 이어 세계 5대 패션도시를 꿈꾸는 서울이 제안한 가을과 겨울 패션은 어떤 모습일까.
○ 과거로의 여행
올가을 겨울엔 어머니의 옷장을 뒤져야 할지도 모른다. 디자이너들의 과거 여행이 계속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1960년대 유행했던 트라페즈(사다리꼴) 미니드레스는 이제 웬만한 무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다만 같은 미니드레스라도 연출 방법에 따라 세련된 도시 여성에서 전원풍의 편안한 캐주얼 차림까지 다양하게 표현됐다.
과거에 대한 환상을 절묘하게 포착한 디자이너는 ‘앤디&뎁’. 부부 디자이너 김석원 윤원정 씨는 이번 서울컬렉션 테마를 ‘잊혀진 세계에 대한 키스(kiss to the forgotten world)’로 잡았다. 화가 클림트의 ‘kiss to the whole world’에서 영감을 얻었다.
윤 씨는 “낡은 다락방의 커다란 궤짝에서 엄마와 할머니의 낡지만 멋진 옷들을 발견한 여성을 상상했다”면서 “클림트의 그림 같은 구릿빛 동색, 금색, 짙은 자주, 녹색 등으로 지나간 아름다움을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앤디&뎁은 간결한 실루엣을 기본으로 동그란 단추 하나도 낡은 듯한 느낌을 내는 등 고급 골동품 가게를 연상시키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 중인 디자이너 조성경 씨의 ‘라뚤’은 1930년대 재즈를 주제로 한 의상을 선보였다. 블랙을 기본으로 짙은 녹색, 보라색, 금색을 주로 사용했고 면 모직 실크에 금속실이나 조각을 덧붙여 화려했던 과거를 현대적으로 해석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에 서울컬렉션에서 꾸민 무대는 2월의 파리컬렉션 쇼를 재현한 것.
○ 상반된 것의 만남
일자 미니드레스와 리본장식, 블랙과 블루, 남성과 여성….
디자이너 양성숙 씨의 패션쇼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었다. 미니멀하면서도 로맨틱하고, 남성적이면서도 여성스러웠다. 올해 그가 정한 테마는 ‘E=mc2’.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패션에 적용해 여성, 남성, 포멀, 캐주얼 등 상반된 스타일로 새로운 에너지를 표현하고자 했다.
디자이너 오은환 씨 작품은 색감의 대비가 두드러졌다. 파랑색과 동빛, 어두운 자주색이 대비를 이루며 복고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이미지를 연출했다. 디자이너 서승희 씨는 소년과 신사, 소녀와 여성을 혼합했다. 1968년 영국 뮤지컬 영화 ‘올리버’에서 영감을 얻어 개구쟁이 같으면서도 절제된 여성복을 만들어 냈다.
디자이너 김동순 씨의 딸로 국내 패션계에서 ‘젊은 디자이너’ 열풍을 이끌고 있는 송자인 씨는 특유의 목가적인 분위기와 도시적인 느낌을 섞었다. 투박하면서 섬세하고, 낡은 느낌이면서 미래를 떠올리게 하는 반짝임이 특징. 하늘거리는 화이트 드레스에 투박한 가죽 잠바를 매치하는 식이다.
가장 한국적이면서 현대 여성의 당당함을 잘 표현한 디자이너는 이영희 씨. 주제는 ‘달빛, 공간 그리고 여자’다. 조선시대 풍속화가 신윤복의 ‘월하정인’ 속 여인에서 출발했다. 낮과 밤을 즐기는 열정적인 현대 여성의 아름다움을 떠올렸다고 한다.
한복의 아름다운 곡선과 직선을 조화시켜 미니드레스에서 롱드레스까지 다양한 스타일을 만들었다. 한복이 수줍지 않고 당당해 보이는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해외 유명 컬렉션과 서울컬렉션의 차이는▼
서울컬렉션은 올해로 14회째다.
올해 서울컬렉션에서 눈에 띄는 변화는 기업 브랜드의 참여가 늘었다는 점이다. 기업 브랜드가 소속 디자이너들의 독창성을 살린 ‘디자이너 브랜드’로 진화하는 현상을 반영한 것이다.
제일모직 ‘엠비오’와 제스인터내셔널의 ‘제스’는 각각 장형태, 박성철 디자인실장을 앞세워 처음으로 참가했다. ‘본’은 올해로 4번째다.
엠비오의 김혁수 브랜드 매니저는 “국내 캐릭터 남성복 시장이 커지면서 2, 3년 후엔 글로벌 브랜드가 대거 들어올 것으로 보인다”며 “변화하는 시장에 대비하려면 디자이너 중심의 브랜드를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컬렉션을 통해 디자이너의 독창성이 반영된 고급 브랜드임을 소비자에게 알리겠다는 뜻이다.
지난해 열린 2007년 봄여름 서울컬렉션에서는 스포츠캐주얼 브랜드 ‘르꼬끄스포르티브’가 배우 봉태규를 객원디자이너로 내세워 관심을 끌었다.
올해는 서울컬렉션을 찾은 해외 바이어가 다소 늘었다. 프랑스 영국 독일 러시아 등 유럽지역 백화점 및 편집매장 바이어 60여 명과 중동지역 유통업체 60여 명, 미주지역 30여 명 등이 방문했다. 한국패션협회에 따르면 이번에 방문한 해외 취재진과 바이어는 약 750명에 이른다.
서울컬렉션 주최 측은 바이어 상담실을 별도로 만들어 해외 바이어와 디자이너가 구매 상담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서울컬렉션이 파리 밀라노 뉴욕 같은 선진 컬렉션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컬렉션은 비즈니스가 핵심이지만 서울컬렉션은 여전히 발표회 형식으로 운영되는 게 현실이기 때문.
선진 컬렉션은 디자이너들이 새 옷을 선보이면 이를 본 바이어들이 옷을 사는 구조다. 컬렉션을 통해 디자이너는 ‘옷 장사’와 ‘브랜드 이미지 제고’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패션업계 관계자는 “해외 바이어를 적극 유치해 실제 구매로 연결돼야 서울컬렉션이 제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