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작업의 정석’의 한 장면
《‘매니큐어를 바르며 시간을 보낼지언정 전화하고 싶은 욕구를 참아라.’
‘상대방에게 문자가 오면 적어도 15분이 지난 후에 답장을 보내라.’
연인의 전화를 애타게 기다리며 휴대전화가 닳도록 만지작거린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배신감을 느낄 만한 얘기들이다.
하지만 새봄 서점가를 점령한 각종 사랑 지침서에는 이런 연애 지침을 실은 전략이 난무한다.
‘연애의 정석’ ‘연애 참고서’ ‘실용연애전서’ ‘연애feel살기’….
제목만 봐서는 연애 수험서인지 지침서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다. ‘전서’니 ‘필살기’니 하는 제목들이 긴장감마저 감돌게 한다. 모든 책들이 ‘살아 있다면 사랑해’라고 외치는 듯하다.》
지금은 연애시대 쏟아지는 연애지침서
요즘 쏟아져 나오는 연애 지침서들은 종류도 다양하다. 판매 실적도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지난 한 해 출시된 사랑 연애 관련 도서만 해도 70여 종이며 판매 실적도 2005년에 비해 20% 이상 신장했다”고 전했다.
이유는 뭘까. 물론 수요자가 많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연애 하면 20대의 전유물이었지만 요즘은 다르다. 전 연령대에서 연애가 가능한 시대라고 할까. 만혼 이혼 재혼 독신 등 사람마다 혼인과 관련한 삶의 형태가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평균수명 연장이 ‘한 사람과의 사랑’만 가능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터넷상에서 남녀의 만남을 주선하며 감성 연애 사이트를 표방하고 있는 ‘더 토크’를 운영 중인 문기헌 대표는 “30대 후반과 40대 초반이 전체 회원의 20%”라고 전한다.
지침서가 난무하는 두 번째 이유는 연애하는 데도 ‘지침’을 찾는 현대인의 심리와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다. 즉 인간관계를 기계적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짙어지면서 연애조차 요리처럼 레시피(조리법)가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사회가 갈수록 복잡해지고 기존에 당연하게 믿어 왔던 규범이나 가치가 무너졌다고 믿을 때 사람들은 불편하고 어려운 현실을 헤쳐 나가기보다 현실을 벗어나 외부에서 문제 해결 모델을 찾게 된다”며 “레시피대로 요리하면 최소한 실패는 하지 않듯 연애도 바람직해 보이거나 멋있어 보이는 사람이 성공한 방법대로 하면 나도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일어나게 된다”고 분석한다.
본래 연애라는 것은 개개인의 관계의 속성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는 아주 사적인 영역이다. 한마디로 딱 잘라 이야기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중에 나와 있는 각종 연애 지침서들은 레시피 같은 일정한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 원칙이라는 것은 크게 △연애도 일종의 게임이고 게임에서 이기려면 느긋하게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사랑에 빠지긴 쉽지만 사랑을 유지하려면 전략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로 나뉜다. 즉 ‘사랑받고 싶다면 머리를 굴리라’는 것이다.
듀오 커플 매니저 이명길(‘연애feel살기’ 저자) 씨는 “연애도 낭만에서 실리로 변하면서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전략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졌다”며 “요즘 젊은이들은 연애도 토플 공부하듯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어 연애 지침서를 찾는 데 주저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연애전략서를 읽고 난 후에야 남자 친구와 헤어진 원인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는 회사원 신모(28) 씨는 “순수파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마음은 그 표현 방법에 따라 꽃이 될 수도, 가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방법을 연구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과연 연애 지침서는 도움이 될까.
대학생 김모(25·서울 송파구 방이동) 씨는 “결국엔 모두 연애라는 게임에서 결코 손해 보지 않겠다는 전략들 같다”며 “사랑은 깨지고 상처받고 그래서 아프더라도 감정에 충실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연애의 진리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성균관대에서 ‘사랑의 심리’라는 제목의 강의를 하고 있는 김금미 교수는 “핵가족, 정보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관계를 유지해 가는 훈련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젊은 세대에게 ‘연애’는 하나의 도전 과제가 되고 있다”며 “성격도, 사랑하는 스타일도 사람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지침서대로 적용하다가는 낭패를 보기 쉽다”고 충고했다.
연애 지침서들은 그야말로 한 사람의 경험이고 생각이기 때문에 불변의 원칙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연애의 다양성 중 하나를 간접 경험하는 것쯤으로 여기라는 것이 그의 주문이다.
박완정 사외기자 tyra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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