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가 주도한 아우내 만세운동에서 어떤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는지를 놓고 충남 천안지역의 향토사학계가 뜨겁다.
천안시사적관리사무소에 따르면 공식기록으로는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유 열사가 충남 천안의 아우내장터(천안시 병천면 병천리)에서 벌인 만세운동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는지, 그리고 낭독됐다면 어떤 내용이었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아우내 만세운동 참가자들의 공적서를 종합해 볼 때 당시 주도자 가운데 한 명인 조인원(조병옥의 부친) 씨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또 이에 앞서 그해 3월 20일 천안시 입장면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에서 최남선의 기미 독립선언서(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 발표)가 배포된 것으로 미뤄 아우내에서도 이 독립선언서가 낭독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각종 전기는 유 열사가 탑골공원 독립만세운동을 목격한 뒤 독립선언서를 품에 넣고 천안으로 내려왔다고 전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천안의 향토사학자인 신상구 천안중학교 교사가 3일 “아우내 만세운동에서 낭독된 독립선언서는 기미 독립선언서가 아니라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이백하(1899∼1985) 선생이 제작한 것”이라는 주장을 내놨다.
그는 이 선생의 아들인 이은창(2002년 작고) 씨가 1977년 7월 1일 국가보훈처에 제출한 ‘항일독립투사 이백하 옹 공적서’를 근거로 제시했다.
이 공적서에는 이 옹이 △유 열사의 숙부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직접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뒤 미농괘지에 철야 복사해 배부했으며 △병천면사무소와 우편소를 습격하고 전화선을 절단했으며 △재의거를 계획하다 체포돼 2년 옥고를 치렀다고 적혀 있다.
공적서에는 문제의 독립선언서 내용도 적혀 있다. 만세운동 당시 모두 불에 타 없어져 이 옹이 나중에 아들 은창 씨에게 구술했다는 것.
이에 대해 유 열사에 대한 각종 기록을 발굴해 온 향토사학자 임명순 씨는 13일 천안시에 제출한 반박자료를 통해 “아우내 만세운동 참가자들의 공적서와 이들에 대한 당시 일제 법정의 판결문 등으로 볼 때 신 씨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우선 “보훈처가 현장조사 등을 거친 뒤 이 옹의 시위 참가와 2년 복역 사실을 인정해 대통령 표창과 애족장을 추서했지만 독립선언서 작성이나 만세운동 주도는 인정하지 않았다”며 “유족이 만든 공적서는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 씨는 또 “이 옹에 대한 일제 법정의 판결문에는 독립선언서 작성 사실이 없을 뿐 아니라 시위도 다른 사람의 권유로 참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며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면 아마도 중죄인으로 다루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했다.
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