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투 경기에 ‘30초 효과’라는 말이 있다. 한 라운드 3분 경기에서 마지막 30초에 선전(善戰)하면 그 강한 인상이 지나간 2분 30초의 부진을 덮어 준다는 뜻이다. 정치에서도 임기 끝자락의 ‘30초 효과’는 정권에 대한 평가를 개선할 수 있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 60개월이니까 다음 정부 출범까지는 10개월이 남았다. 권투로 환산하면 한 라운드 3분에서 30초가 남은 셈이다. ‘30초 효과’가 시작되는 때에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타결함으로써 국민으로부터 취임 후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현직 대통령이 언론과 야권에서 그처럼 열렬한 박수를 받은 것은 우리 정치사상 지극히 드문 일이다.
한미 FTA가 이 정부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해도 이렇듯 떠들썩한 지지 반응은 다소 의외였다. 물론 협상 타결에 대해서는 세상 물정 모르는 몇몇 정치인과 FTA에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사람들을 제외한 대다수 국민이 환영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가장 적극적 지지가 바로 노 대통령이 대선 때부터 혐오하고 적대시해 온 야당과 정통 언론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현 정권이 말해 온 것처럼 야당과 언론은 “사사건건 정부 정책에 감정적으로 비판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안에 따라 시시비비를 가려 온 이들 집단에 대해 노 대통령은 이번 일을 계기로 고정관념을 버리고 색안경도 벗을 필요가 있다.
고정관념 버리고 색안경 벗을 때다
노 대통령이 취임 후 아마도 처음으로 받았을 뜨거운 찬사와 칭찬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안을 현상 그대로 단순하게 보자면 자유무역은 세계적인 추세이고 우리의 미래가 걸린 길이라 방향을 잘 잡은 것이니 칭찬은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협상의 상대국인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을까. 미국 협상 팀이 아무리 ‘남는 장사’를 했더라도 그 나라 언론이나 야당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대통령답다’고 치켜세웠을까. 요란스러운 지지 여론의 배경에는 그동안 ‘대통령다운 대통령’을 원했던 국민의 기대 심리가 깔려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노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마지막 기대일지 모른다.
지난 50개월간 이 정권이 빚어 낸 갈등, 그리고 국민정서와 동떨어진 정책 방향과 집권세력의 미덥지 못한 언행 때문에 많은 국민의 이마에는 내천(川) 자가 새겨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극소수 노 대통령 추종자 이외의 국민 대부분은 이미 참여정부를 실패한 정권으로 결론 내리고 있던 차에 그가 지지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협상을 타결한 데서 국민은 한 가닥 희망의 빛을 본 것이다. 노 대통령이 이를 전환점으로 남은 임기 10개월간 올바른 방향으로 더욱 분발하기를 바라는 국민의 소망이 그처럼 다소 과장된 지지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지난 주말 청와대가 개헌안 발의를 철회해 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은 것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일각에서는 세불리(勢不利)를 느낀 노 대통령이 굴복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과연 그럴까. 현 정권 주도의 개헌 지지세는 처음부터 없었지 어제오늘 갑자기 없어진 것은 아니다. 또 노 대통령은 그의 성격상 승산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굴복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그동안 여러 차례 봐 왔다. 따라서 나는 이번 결정도 그가 국민여론과 정치권의 이유 있는 주장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또 하나의 변화라고 보고 싶다. 노 대통령과 지근거리에 있는 정부 고위 인사도 어제 필자에게 “굴복이 아니라 변화!”라고 단언했다. 그렇다면 ‘30초 효과’의 시작은 좋다고 할 수 있다.
과거로 돌아가면 더 큰 고통 받을 것
한미 FTA 협상 타결 후 ‘성공한 대통령’을 기대하는 글이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염두에 둬야 할 것은 불행히도 인간의 심성이 늘 그렇게 천사와 같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통증은 더 큰 법이다. 여론이 좋아진 터에 노 대통령이 만약 다시 과거와 같은 오류에 빠진다면 국민의 실망과 분노는 과거보다 더할 것이고 대통령의 아픔도 더 클 것이다. 그것을 막는 길은 한 가지다. 노 대통령이 한미 FTA로 시장을 열었듯이 이제 마음의 문도 여는 것이다. 국민에게, 야당에, 언론에… 그리고 교육 문제에, 부동산 정책에, 남북한 문제에도….
이규민 大記者 kyum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