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줍은 소녀? 당당한 소녀!요즘의 10대 여학생들은 앞에 나서서 친구들을 이끌거나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데 두려움이 없다. 2월 서울 성동구 행당동 행당중학교에서 한 여학생이 학급 학생들 앞에서 의견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제공 서울시교육청
《7일 치러진 서울 중앙대부속고 전교 학생회장 선거. 한 팀을 이룬 2학년 박다영(18) 양과 이재혁(17) 군이 남학생이 학생회장 후보인 다른 팀을 290여 표차로 제치고 각각 학생회장과 부학생회장에 당선됐다. 원래는 이 군도 학생회장 후보로 나오려 했다. 이때 박 양이 이 군에게 ‘정치적 협상’을 제의해 한 팀으로 출마한 것. 이 군은 “회장으로 나가려는 마음이 있었지만 학생회 활동만 하면 된다는 나와 달리 다영이는 회장이 되겠다는 마음이 강했다”며 “내가 굽히지 않으면 충돌하게 되니까 양보했다”고 말했다. 여학생이 적극적으로 나서 리더 자리를 쟁취하는 사례는 박 양만이 아니다.》
초중고교에서 이제 여학생이 학급회장을 넘어서 전교 학생회장까지 맡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일부 학교에서는 각종 동아리 회장은 물론 카리스마의 상징인 선도부장까지 여학생들이 차지해 교내 학생활동을 주도하고 있다.
○ 학생회 간부 절반 넘게 차지
본보의 자체 조사 결과 남녀공학인 서울지역 일반계 고교 61곳 가운데 전교 학생회장이 여학생인 곳은 15곳(25%)으로 아직까지 다수는 아니다.
하지만 8년 전인 1999년 이화여대 허라금(여성학과) 교수 등이 발표한 ‘남녀공학 운영 실태조사 및 내실화 방안’이란 연구보고서에 나온 전교 학생회장 성비(性比)와 비교할 때 큰 차이가 난다. 당시 조사에서는 남녀공학 일반계 고교 54곳 가운데 학생회장이 여학생인 곳은 6곳(11.1%)뿐이었다.
중학교에서는 여풍 바람이 더욱 거세다. 본보가 서울지역 남녀공학 중학교 25곳을 표본조사한 결과 10개 학교(40.0%)의 전교 학생회장이 여학생이었다.
리더 여학생이 늘어나면서 선도부와 같은 힘과 카리스마를 요구하는 학생회 직책을 여학생이 맡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서울 창동고의 전교 학생회장은 남학생이다. 그러나 환경부장, 총무부장 등 학생회 간부 20명 중 절반이 넘는 11명이 여학생이다. 동아리 회장 20명 가운데는 12명이, 자율부원(선도부원) 40명 중에선 22명이 여학생이다. 실제 학교를 이끌어 가는 리더그룹 80명 중 45명(56.3%)이 여학생이다.
지난해 전교 학생회장을 지낸 조성민(18·서울 삼성고 3) 군은 “등교 때마다 교문 앞을 지키는 자율부를 모집하는데 여학생만 몰리고 남학생은 미달돼 추가 모집을 받았다”며 “자율부장도 카리스마 있는 여학생이 맡았다”고 말했다.
여학생이 전교 학생회장을 맡고 있는 서울 청담고의 정인순 교감은 “여학생이 전교 학생회장이 됐을 때 나만 놀랐지 모든 선생님과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며 “여학생이 리더를 맡는 것이 이젠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고 말했다.
○ 공부는 기본, 리더십까지
학교 리더그룹에 여학생이 크게 늘어난 것은 여학생의 자아 정체성이 달라진 데 일차적인 원인이 있다.
장년층은 10대 여학생 이미지로 대중 앞에서 부끄러움을 많이 타고 나서기를 싫어하며 친구들과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사춘기 소녀’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지금의 리더 여학생들은 다르다. 의사 결정을 할 때 주도적이고 도전의식이나 자기계발 욕구가 강하다.
한국고등학교학생회연합회에서 단체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하향(18·서울 홍대부속여고 3) 양은 어떤 상황에서건 의견을 먼저 말하고 뜻을 모으는 것을 즐긴다.
박 양은 “친구들은 교실에 먼지가 없을 때도 ‘청소를 간단히 하겠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리기를 망설이지만 난 아이들에게 ‘해 보자’고 제안하고 또 선생님께 전한다”며 “이런 과정이 뿌듯하다”고 말했다.
본보 설문조사에서도 리더 여학생은 일반 여학생은 물론 일반 남학생보다 자기주도성, 비전, 자기계발 등의 항목에서 월등히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이들 항목은 성공한 리더의 주요 특징으로 꼽히는 것이다.
자기주도성을 보여주는 항목 중 하나인 ‘남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보다 스스로 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문항에 리더 여학생 중 85.6%가 ‘그렇다’고 답했다. 같은 질문에 일반 남학생은 72.2%, 일반 여학생은 61.3%가 ‘그렇다’고 답했다.
○ 여성 리더에게 거부감이 없는 남학생
여학생 리더가 급증하는 것에는 피선거권자인 남학생의 ‘혁명적인’ 의식 변화도 큰 몫을 했다.
본보 설문조사에 따르면 일반 남학생 158명 가운데 무려 146명(92.4%)이 ‘내가 속한 조직의 리더가 여성이냐 남성이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답했다.
‘학급회장이나 학생회장 선출 시 여학생에게 투표할 수 있다’고 답한 비율도 93.0%에 이르렀다. 반면 ‘남학생이 여학생에 비해 리더십이 강하다’는 응답은 37.3%에 그쳤다.
여학생 학급회장 비율이 60%에 육박하는 서울 신목고 김종구 교사는 “요즘 남학생은 성적이나 리더십이 뛰어난 여학생을 가까이에서 직접 보고 자라 자연스럽게 능력은 성별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부모의 태도 변화도 여학생의 리더계층 진입을 돕고 있다.
서울 중대부고 김영란 교사는 “요즘 학부모들은 딸이 리더십을 키우는 경험을 갖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다”며 “딸이 부회장 선거에 나간다고 하면 오히려 회장 선거에 출마하기를 권유하는 학부모가 상당수”라고 말했다.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아버지의 힘…경쟁심-성취욕 키워줘▼
경기 안양시 동안고 전교 학생회장인 최은미(18) 양은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2학년 때 각각 학급회장을 맡았다. 최 양은 초등학생 때 경기도 육상 대표로 전국체전에 출전하기도 했다.
중학생 때는 밴드부에서 전자기타를 맡아 안양시 주최 청소년 록페스티벌에 출전해 상을 받았다. 지난해 가을 학생회장 선거에서는 3학년 선배들의 마음을 잡기 위해 점심시간마다 3학년 반을 돌며 노래와 춤을 선보이는 등 자신의 끼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과연 최 양의 이런 적극성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그는 스스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찾았다.
“등산, 배드민턴 등 운동을 좋아하는 아버지를 어렸을 때부터 따라다녔어요. 운동은 1등이 아니면 소용이 없잖아요. 그때부터 승부욕이 생긴 것 같아요.”
심리학자들은 딸이 사춘기에 이를 무렵 부녀관계를 정서적으로 가장 소원한 관계로 규정한다.
하지만 미국 하버드대 아동심리학과 댄 킨들런 교수는 ‘알파걸’이란 책에서 “아버지와 딸 사이의 친밀한 관계는 딸들의 사고방식과 심리, 사회와의 교류 방식, 인생에 대한 소망과 기대치에 깊은 영향을 준다”고 밝혔다.
실제 리더 여학생은 이전의 여성들에 비해 아버지와의 관계가 돈독했다.
본보의 설문조사에서 리더 여학생 중 81.1%가 ‘아버지에게 인정과 신뢰를 받고 있다고 느낀다’고 답했다. 같은 항목의 일반 여학생은 58.3%만이 ‘그렇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감정 문제를 의논한다’는 항목에서도 리더 여학생은 41.7%가 ‘그렇다’고 답한 반면 일반 여학생은 26.8%만이 긍정 답변을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들이 가르쳐 주지 못했던 남자들을 대하는 법이나 경쟁 상황에서 대처하는 법을 배우는 데도 도움을 준다는 것.
경기 양명여고 학생회장인 이지혜(18) 양은 지난해 학생회장 선거에서 아버지의 덕을 톡톡히 봤다.
급식소가 턱없이 작아 ‘급식소 확장’이 몇 해째 선거공약으로 내걸리지만 예산 부족으로 실제 추진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아버지는 이 양에게 어떤 절차로 교육청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확인해 ‘급식소를 확장하겠다’가 아닌 ‘이런 절차로 추진하겠다’를 공약으로 내걸라고 제안했다. 아버지의 제안은 최고의 공약으로 평가받았다.
이 양은 “엄마는 학생회 활동이 공부에 방해가 될까봐 걱정을 하지만 아빠는 늘 여학생도 리더가 될 수 있다고 힘을 주면서 학생회 활동에 아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정혜진 기자 hye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