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조강수 씨가 활짝 웃고 있다. 어렵게 취업한 직장에서 더 활동적으로 일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안철민 기자
《서울시 ‘휠체어 직원 1호’인 재무과 조강수(38) 주임. 스물한 살 때 군대에서 입은 총기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된 그는 1995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2004년 귀국했다. 10년 만에 돌아온 한국. 강산이 변한 만큼 장애인을 둘러싼 환경도 변했을까. 20일 ‘장애인의 날’을 앞두고 장애인으로서 두 문화를 겪은 조 주임의 경험을 재구성한다.》
서울시 ‘휠체어 공무원 1호’ 조강수 씨의 미국과 한국생활
○ 1995∼200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미국에서 10년간 사는 동안 아파트 3층에도 2, 3년 살았지만 불편함이 없었다. 내가 살던 캘리포니아 주에는 장애인과 노약자들의 이동 편의를 위해 거의 모든 2층 이상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다.
장애인 주차 공간이 충분해 자가용 이용이 편하지만 버스 타기도 불편하지는 않다. 버스 문이 열리면 슬로프가 내려오고 버스에 올라 널찍한 휠체어 전용 공간에 자리를 잡으면 내 차를 운전하는 것보다 편하다.
2001년부터 학생들에게 강의를 했다. 영어도 서투르고 몸도 불편한 내게 지도교수가 강의를 맡겼을 때는 고마움보다 의아함이 앞섰다. “한국이라면 다들 내가 해내기 힘들 거라고 지레짐작했을 텐데….” 2002년 석사를 마치고 평소 마음에 두었던 몇 군데 회사에 지원할 때 서류양식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사진을 붙이는 곳도 나이나 키, 장애 여부를 묻는 난도 없었다. 대신 장애인이라고 우대해 주는 조항도 없었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세계적 반도체 디자인 회사 ‘케이던스 디자인 시스템’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해 달라’는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같은 학과 동기들보다 먼저 사회에 나가게 된 것에 아내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1년 반 만에 경영 악화로 부서가 없어졌다. 미국 사회에서 이직은 흔한 일이었지만 아내는 “이참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귀국을 생각하니 대학시절 4년간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답답해졌다. 강의실을 계단으로 오르기 위해 하루에도 수십 명에게 “나 좀 올려 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 2004∼2007년 서울
10년 만에 찾은 한국은 꽤 변해 있었다. 우선 보도의 턱이 많이 사라져 휠체어 운행이 편했다.
달라진 환경에 용기를 내 대기업 3군데에 원서를 냈다. 한 곳은 “휠체어를 탄다”고 했더니 “이곳은 건물이 오래돼 엘리베이터가 없다”고 했다. 다른 한 곳에선 “나이가 너무 많다”고 했다.
한국식으로 나이, 사진, 장애 사실을 다 밝힌 지원서 수십 장을 대기업 중소기업 가릴 것 없이 냈다. 중소기업 두 곳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지만 모두 장애 사실을 확인하고는 “원서를 대충 읽어 잘 몰랐다”며 면접 제안을 철회했다.
차별을 받는다고 느끼지 않았지만 장애인에 대한 취업 혜택도 없었던 미국과 달리 한국에는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에 채용 인원의 2%를 장애인으로 뽑아야 하는 의무규정이 있었다.
마침내 2004년 10월 장애인 전형으로 서울시 공무원 행정직 7급에 합격했다. 첫 배치는 산업지원과. 그러나 인사과 직원은 출근 첫날 휠체어를 타고 나타난 나를 보고는 “장애인 관련 과에 배치해야 하는 거 아닌가. 괜찮겠느냐”며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부서가 있는 시청 별관에서 구내식당까지 가려면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한다. 동료 직원들이 매일 헉헉 숨을 고르며 휠체어를 밀어 줄 때마다 그저 미안한 마음이다.
오늘은 외부 행사장에 다녀왔다. 오랜만의 활동적인 업무에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는 듯했다.
취업 이후 처음 맞은 2007년 봄 정기 순환인사. 인사 담당자는 내게 ‘시민협력과’와 ‘재무과’를 추천했다. 두 부서 모두 앉아서 하는 업무가 주다. 사람들은 장애인은 앉아서 하는 일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활동적인 업무를 할 수 있다. 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정적이지도, 불행하지도 않다.
이 설 기자 sno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