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오전 7시 15분(현지 시간) 웨스트 앰블러 존스턴 홀.
900명의 신입생이 거주하는 미국 버지니아공대(버지니아텍) 기숙사는 여느 날처럼 아침 등교 준비로 부산했다.
평범한 외모에 청바지와 검은색 조끼를 걸쳐 입고 이 방 저 방을 뒤지고 다니는 남학생을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끼 주머니에 9mm 글락 권총과 탄창이 감춰져 있는 것을 알아챈 사람도 없었다.
이윽고 한 방에서 여자 신입생 에밀리 힐셔를 발견한 이 학생은 격한 말을 퍼붓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힐셔는 범인의 옛 여자친구였다. 다툼이 격해지자 학생 지도를 담당하는 3학년 라이언 클라크가 이들을 애써 말려 보려 했다.
탕, 탕….
등교 준비를 서두르던 학생들은 귀청을 때리는 몇 발의 총소리에 경악했다. 범인이 검은색 조끼 주머니에서 꺼낸 권총이 불을 뿜은 것이다. 힐셔와 클라크는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범인은 기숙사를 빠져나갔고 목격자들은 ‘911’에 신고했다. 출동한 경찰은 기숙사에서 학생들을 나가게 한 뒤 목격자를 상대로 조사에 들어갔다.
경악 속에서도 학교는 조금씩 평온을 찾아가는 듯했다. 오전 8시 예정됐던 강의가 시작되고 8시 25분 학교 관계자들은 대책 마련을 위해 회의를 열었다. 9시 26분 학생들에게 첫 번째 e메일이 발송됐다. 총격 사건이 발생했으니 조심하고 의심스러운 일을 목격하면 즉시 경찰에 신고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즉시 e메일을 확인하거나 그 내용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관광학과 강사인 현성엽 씨도 대수롭지 않은 내용으로 여기고 사건 현장에서 80여 m 떨어진 강의실로 출근했다. 320만 평 규모의 캠퍼스에서 기숙사 총격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탕, 탕, 탕….
9시 45분경 느리고 규칙적인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인근 공사장에서 나는 발파음 같았다. 그러나 총소리였다. 이번에는 공학부 건물인 노리스 홀이었다.
“오전 9시 45분경 응용수리학 강의가 한창인 강의실에 갑자기 괴한이 들이닥쳤다. 범인은 탄창을 바꿔 가며 마구 총을 쐈다.”
강의실에서 총상을 입은 토목공학과 석사과정 1학기 박창민(28·한양대 졸업) 씨는 몽고메리 지방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은 뒤 악몽의 순간을 회고했다.
강의실 뒷자리에 있던 그는 바닥에 엎드리는 순간 총알 한 방이 가슴 아랫부분을 스친 뒤 오른팔을 관통했다.
움직이는 사람이 없자 괴한은 독일어 수업이 진행되는 옆 강의실로 옮겨갔다. 독일어 수업을 듣고 있던 트레이 퍼킨스 씨는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고 말했다.
행정대학원 2학년 라이언 피셔 씨는 독일어 강의실에서 중상을 입은 친구의 증언을 본보 기자에게 전해 줬다.
“옆방 총소리에 놀라 교실 문을 잠그려 하는데 검은색 조끼를 입고 총을 든 남자가 들이닥쳤다. 문에서 1.5m가량 들어선 그는 먼저 독일어 교수를 쏜 뒤 학생들을 겨냥해 총질을 시작했다. 1∼2분쯤 계속됐을까. 그는 옆방으로 옮겨가 또 방아쇠를 당겼다. 몇 분 후 그는 우리 교실로 돌아왔다. 이미 무릎에 총상을 입은 내 친구의 다리에 두 발을 더 쐈다.”
범인은 아예 건물 출입문을 안에서 쇠사슬로 걸어 잠근 뒤 두 강의실을 오가며 확인 사살을 계속했다. 심지어 학생들을 벽에 줄지어 세운 뒤 총살형을 집행하듯 한 명씩 쓰러뜨렸다.
어떤 학생은 머리와 얼굴에 총을 맞아 신원 확인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형체가 망가졌다. 25명이 수업을 듣던 독일어 강의실에서 무차별 총격이 끝난 뒤 걸어 나온 사람은 4명에 불과했다.
현장에서 팔에 총을 맞은 학생인 데럭 오델 씨는 “그가 옆 강의실로 간 사이 우리는 문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그가 그 소리를 듣고 문에다 총을 쐈다”고 말했다.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이 총소리에 놀라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건물 문이 안에서 쇠사슬로 잠겨 있어 열 수 없었다. 겁에 질린 몇몇 학생은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잔혹한 학살(massacre)이 범인의 자살로 마무리될 즈음인 오전 9시 55분. 총격 사건을 알리는 두 번째 e메일이 발송됐다. “총을 가진 남자가 교정에 난입했으니 건물 밖으로 나가지 말고 창문에서 떨어져 있어라”는 내용이었다. 비슷한 내용의 교내 방송도 흘러나왔다.
강의 취소는 오전 10시 16분에야 이뤄졌다.
이 사건이 미국과 세계를 뒤흔들면서 학교와 경찰의 늑장 대응에 질타가 이어졌다.
뉴욕타임스는 “1차와 2차 범행이 동일범의 소행으로 밝혀진다면 경찰은 왜 2차 범행을 막지 못했으며 캠퍼스 전체를 봉쇄하지 않았는지 해명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건 발생 하루 만인 17일 오전 경찰은 미국 사상 최악의 총격 사건으로 기록된 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 사건의 용의자를 발표했다. CNN과 폭스뉴스는 경찰의 기자회견을 생중계하면서 커다란 자막으로 용의자의 이름을 보도했다.
‘한국인 조승희(Cho Seung-Hui)’.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블랙스버그=김승련 특파원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