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과 세상을 사랑하고 아파한 때문으로 박해를 받는 시절은 아름답다. 삶의 양대 본질, 절망과 희망 곁에서 해일처럼 밀려오는 그리움과 슬픔, 분노와 억압의 감정을 고스란히 경험할 수 있으므로. 인간이, 인간성이 무엇인지 뼈끝으로 찍어 바르는 눈물을 경험할 수 있는 절박한 시절이므로.》
책에 대한 예의는 결국 책읽기에 대한 예의다. 책에 따라 읽어야 할 장소가 따로 있다. 꽃놀이 가는 열차 안에서 법률 서적에 형광펜을 긋는 사람은 독서가가 아니다.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만의 독서 공간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책을 위한 특별한 공간이 없다면, 책에 따라 그 공간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아직 독서가가 아니다.
나는 아직 독서가가 못되지만 어떤 책에 대해서만큼은 각별하려고 애쓴다. 기행서는 남다른 장소에서 읽으려 한다. 기행서 중에서도 남도 사람의 그윽한 눈매와 깊은 목소리가 내장되어 있는 책, ‘곽재구의 예술기행’을 펼쳐 든 곳은 벚꽃 이파리가 흩날리며 춘설처럼 쌓이는 교정의 후미진 벤치였다. 나쁘지 않은 장소였다.
벚나무 그늘에 앉아, 하르르 하르르 떨어지는 꽃잎을 맞으며, 책장을 열었다. 마침, 곽재구 시인은 꽃 이야기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남해안의 포구를 돌며 ‘외로움이 깊어지는 시간’을 스케치했던 시인의 ‘포구 기행’에 대한 독후감이 아련한 터여서 그의 예술 기행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었다.
시인의 발길은 남해 금산, 화개장터, 질마재, 부여, 강진, 진도, 통영, 장흥 등 남도 중에서도 주로 ‘아랫녘’을 돌다가 강원도 봉평과 서울 종로 한복판으로 북상하기도 한다. 시인이 몇 권의 시집과 취재노트를 들고 찾은 곳은 대부분 십수 년 만에 다시 찾은 곳이다. 십수 년 사이에서 시인의 기억은 파르르 떨린다. 그 기억의 한 뿌리는 저 ‘80년 5월’에 박혀 있다.
예술기행은 목적이 뚜렷한 여행이다. 이성복 김동리 서정주 신동엽 박인환 이청준 한승원 등 한국 현대문학의 산맥을 등정하는가 하면, 윤두서와 다산, 윤이상, 이중섭, 김환기의 고향을 찾아 예술의 태자리를 탐사한다. 그러니까 곽재구 시인의 예술기행은,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다 간 예술가의 생애를 역사와 시대를 배경으로 복원하는 ‘탐사 보도’이기도 하다. 곽재구 시인이 수시로 저널리스트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1990년대 초반에 쓴 것이다. 책에 소개된 질마재나 통영 부여 강진은 몰라보게 달라졌을 것이다. 진도 아리랑을 부르던 노인은 대부분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옛이야기’가 아니다. 곽재구 시인의 기행의 최종 목적지는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예술가의 내면이었기 때문이다. 시인이 예술가의 고통스러운 생애와 만나던 그 장소들이 독자인 우리의 마음속에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곽재구 시인은 패러다임이란 용어를 자주 사용했다. 자발적이고 내면적인 변화, 그리하여 총체적인 변화를 목말라 한다는 증거다. 그렇다. 변화를 꿈꾸지 않는 자, 여행을 꿈꾸지 않는다. 지금 여기가 행복한 자, 예술가를 떠올리지 않는다. 오늘과 다른 내일을 꿈꾸면서도 떠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곽재구의 예술기행’ 속으로 떠나 보라. 점심시간이든, 지하철 안이든, 주말이든 언제든 원할 때 떠날 수 있다.
이문재 경희사이버대 초빙 교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