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이금희 아나운서는 이영표 선수를 인터뷰하기 위해 만났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당신의 미소는 그들의 포효보다 강하다… 멈추어라, 공이여
한심한 정치, 답답한 경제, 복잡한 사회, 뻔한 연예면. 신문을 봐도 읽고 싶은 기사가 별로 없다. 그나마 즐겁게 펼치게 되는 것은 스포츠 면이다. 선수들의 패기와 열정이 살맛나게 한다. 그중에서도 우리 선수 넷이 뛰고 있는 프리미어리그 소식은 기분 좋은 설렘을 안겨 준다.
독일 월드컵이 한창이던 지난해 7월, 이영표 선수를 인터뷰했다. 그때만 해도 그에 대한 내 관심은 일반적인 호감 이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스튜디오로 들어오는 순간,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밀려드는 스태프와 방청객의 사인 부탁과 카메라 세례에도 일일이 웃으며 응해 주었기 때문이다.
녹화가 진행되는 두 시간 내내, 그는 예의 그 초롱초롱한 눈빛을 빛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화술과 유머 감각도 빼어났다. 스쳐 지나가듯 던진 한마디에도 뜻이 담겨 있었다. 그는 몸으로 철학을 하는 사람이었다.
○ “이것이 바로 피눈물이 아닐까”
초등학교 때부터 공을 차기 시작했던 이영표는 방안에서도 양말을 동그랗게 뭉쳐서 연습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대학 3학년 늦가을 오후, 문득 둘러보니 운동장에 아무도 없었다. 친구들은 놀면서도 잘하는데, 열심히 해도 안 되는 나는 재능이 부족한 게 아닐까.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더니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울면서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피눈물인가 보다.”
피눈물을 흘리면서 그는 연습을 거듭했다. 헛다리짚기 드리블을 익히기 위해 왼발 오른발을 수없이 교차했다. 복사뼈에 피가 뭉치고 고일 정도로. 그렇게 익힌 드리블 덕분에 뜨겁게 흘렸던 눈물 덕분에, 그는 유럽 최고의 왼쪽 수비수로 우뚝 서게 되었다.
어찌 축구만 그렇겠는가. 성대에 혹이 생기고 목이 쉰 가수도, 굳은살이 박여 울퉁불퉁해진 발로 무대에 오르는 발레리나도,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며칠 밤을 꼬박 새우는 카피라이터도 다르지 않으리라. 한계에 부딪치고 절망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추스르고 일어나야 한다. 비 온 다음, 하늘엔 무지개가 뜨고 땅은 더 굳어지니까.
○ “공을 지배한다는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야구가 투수의 경기라면, 축구는 골잡이의 경기일 터이다. 공격수가 환호를 받으며 짜릿한 골 맛을 즐길 때, 수비수는 멀찌감치 서서 지켜보기만 한다. 불만은 없을까. 그러나 그는 수비수만이 느끼는 특별한 재미가 있다고 했다.
“수비를 할 때면 터치라인과 내가 같은 편이라는 생각이 든다. 원하는 공간과 거리 안에 상대 공격수를 몰아넣으면 그 선수가 당황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럴 때는 그 공간을 내가 지배한다는 생각이 든다.”
수비수만 아는 그 기쁨의 크기가 공격수가 골 넣었을 때 느낄 그것보다 크다는 그가 참 당당해 보였다. 세상에는 수비수가 많다. 새벽을 열며 거리에 나와 비질을 하는 환경미화원, 운전대를 잡고 기어를 넣으며 사람들을 일터로 데려다 주는 버스운전사. 그런 분들이 자신만의 기쁨을 찾아내면 좋겠다.
○ “상대 선수가 화를 내면 나는 냉정해진다”
축구만큼 격렬한 스포츠도 별로 없을 듯싶다. 야구는 헬멧으로 선수를 보호하고 배구는 네트로 공격과 수비를 나누지만, 축구는 보호대로 정강이만 감싸고 몸과 몸을 부딪친다. 선수들은 한창 뜨거운 피가 펄펄 끓어오르는 때이다. 욕설이 튀어나오고 땀이 엉킨다. 반칙과 경고도 오고간다. 그러나 이영표는 한 번도 레드카드를 받은 적이 없다. 일부러 침을 뱉는 선수도 있는데, 상대가 그렇게 흥분을 하면 그는 게임이 재미있어지겠구나 싶어 웃음이 나온다고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고,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인내하는 선수가 바로 이영표이다.
그의 눈가에는 나이에 비해 제법 굵은 주름 몇 개가 자리 잡고 있다. 그라운드를 누비면서 겪어냈던 수많은 위기를 이겨낸 주름, 속상함을 웃음으로 덮어내어 생겨난 주름일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성숙의 나이테이리라.
○ “나는 그늘을 좋아한다”
우리나라의 프리미어리거 1호인 박지성 선수의 그늘에 가려 섭섭하지 않으냐는 질문을 그는 이렇게 되받았다.
“그늘? 어쩐지 시원하다 싶었다. 나는 그늘을 좋아한다. 서늘해서 낮잠 자기도 좋다. 햇볕 아래에서 낮잠을 청한 적이 있는데, 뜨거워서 잘 수 없었다. 누군가 내게 그늘을 허락한다면 그 사람에게 감사할 것이다.”
그는 당당하면서도 겸손했다. 껄끄러운 질문을 매끄럽게 유머로 받아넘길 만큼 여유가 있었다.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시청률 높은 프로그램을 맡은 후배를 보면서 부러워한 적은 없었나. 웬만한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는 선배를 시샘한 적은 없었나…. 앞서가지는 못하더라도 뒤처져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닦달하지는 않았나. 부러워 말고 괴로워 말고, 그늘의 즐거움을 찾아봐야겠다.
○ “내 목표는 하나. 재미있게 축구를 즐기는 것이다”
낯설고 물 선 곳에서, 피부색과 언어가 다른 사람들 틈에서 그는 뛰고 있다. 보이지 않는 태극 마크를 가슴에 붙이고 이를 악물 것이다. 부담스럽지는 않을까. 그는 이야기한다. “나는 축구 그 자체가 즐겁다. 지금도 수준 높은 축구를 하기 위해 빅 리그에서 뛰는 것이 즐거울 뿐이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즐겁게 일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그들은 행복하다. 그 덕에 우리도 덩달아 행복해진다. 한 사람의 행복한 미소가 민들레 씨처럼 조용히, 그러나 멀리 날아가서이다. 이영표. 그는 축구를 즐긴다. 그를 통해 나는 인생을 즐겁게 배운다.
이금희 방송인
■ “이금희씨가 저를… 기분이 좋네요”
갚羞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