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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답사기 30선]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城)

입력 | 2007-04-24 03:04:00


《성은 한쪽 발을 공간 속에, 다른 한쪽 발을 시간 속에 딛고 서 있다. 허물어진 벽의 이쪽은 과거요 저쪽은 미래다. 너무나도 오래되어 완전히 소진되고 만 기억의 먼지, 그 먼지가 마침내 빛 밝은 허공 속으로 떠오를 때 그것을 우리는 미래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무엇에 매혹당할까. 크고 넓은 집과 정원과 언제나 믿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사람,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는 아이들. 나도 그런 것에 매혹당한다. 그리고 이 말, ‘여행’이라는 말에는 언제나 매혹당한다.

매혹이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 자연의 힘과 같은,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우리를 압도한다. 그것은 그 매혹의 대상이 우리를 행복에 이르는 길로 인도할 거라는 기대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행복해지고 싶을 때 변명할 수 없을 만큼 외로울 때 나는 기꺼이 저항하듯 ‘여행’에 이끌리곤 한다.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은 프랑스문학자 김화영 선생의 ‘여행’에 관한 글들을 수록해 놓은 예술기행문이다. 젊은 시절, 한번쯤 카뮈와 플로베르와 발자크, 그리고 가깝게는 파트리크 모디아노에게 빠져 본 적 있다면 저자에 대한 설명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그는 정교하고 미학적인 번역과 글쓰기로 널리 알려진 작가이다.

이 책은 그가 ‘알베르 까뮈의 작품에 나타난 물과 빛과 이미지’로 프로방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카뮈의 무덤이 있는 마을, 루르마랭을 찾아가는 길부터 시작한다. 그 여정은 프루스트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무대인 콩브레 성,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클로 뤼세 성’, 그리고 조르주 상드의 ‘노앙 성’을 거쳐 파리 한가운데 노트르담, 개선문까지 시간을 반추하는 새로운 사유의 ‘프랑스 지도’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성’이란 무엇일까. 현실의 땅 위에 건축된 집이지만 그 첨탑이나 탑실은 꿈의 공간으로 사라진, 시간의 깊이로 지은 건축물. 저자는 그것이 성이라고 말한다. 꿈과 환상. 거기엔 그런 것들이 살고 있어야 할 것 같다. 그곳을 찾아가는 여정이 쉽기야 하겠는가. 낯설고 궁금하고 약간은 두려운 길. 그래서 트렁크를 끌고 낯선 도시에 막 도착하면 가슴이 떨리는 것일까. 플로베르가 말했듯 마음은 팔 수도 살 수도 없는 것이지만 줄 수 있는 보물인 것처럼, 나는 팔 수도 살 수도 없는 것이지만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보물이 바로 여행이라고 짐짓 단정해 버리는 것이다.

사람은 같은 시간에 두 장소에 머물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하다. 여기서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을 읽고 있는 사이, 또 하나의 나는 어느새 훌쩍 달빛 속의 노트르담을 걷고 있거나 생제르맹 거리, 한갓진 카페에 앉아 뜨겁고 진한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이것 참, 여행 가고 싶은 마음 꾹꾹 눌러 봐야 소용이 없다. 저마다의 시간으로 짓는 성. 그런 성이 나에게도 어딘가엔 있을 텐데.

서문만 읽어도 너무나 아름다운 이 책. 읽는 내내 프루스트가 마들렌 과자와 차 한 잔을 마시며 느낀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이 책,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이전에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그런 성의 문을 한번 열어 보지 않겠어요?라고. 자 이제 당신이 떠날 차례다. 이 봄이 다 지나가기 전에.

조경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