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BA’ 라틴음악 종주국을 가다
‘세상에서 가장 긴 바(Bar).’ 카리브 해의 파도가 쉴 새 없이 철썩이는 쿠바 아바나 항구의 말레콘 방파제를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해질녘 어스름한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씩 들어오는 방파제 위에는 연인들이 서로를 감싸 안고 대화를 나눈다. 방파제를 넘어오는 시원한 바닷바람에는 어디선가 노천카페에서 연주하는 타악기의 리듬과 기타의 선율이 실려 온다.
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에서 말레콘 방파제를 넘어오던 파도처럼 쿠바 음악은 월드 뮤직계를 주기적으로 강타해 왔다. 19세기 말부터 쿠바에서 생겨난 하바네라, 맘보, 룸바, 차차차, 아프로 쿠반 재즈, 살사까지. 그중 가장 최근 것은 1990년대 후반 전 세계적으로 600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를 기록했던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열풍이었다. 10월 문화예술위원회가 경기 이천에서 개최하는 ‘원 월드 뮤직페스티벌’을 앞두고 월드뮤직의 강국 쿠바를 찾았다.
○ 세계음악의 용광로
“쿠바인들의 피 속엔 음악이 흐르고 있어요. 쿠바인들은 자신의 전통음악뿐 아니라 세계의 음악을 받아들여 최고의 음악을 창조하지요.”(훌리오 노로냐·그룹 ‘로스 반 반’의 멤버)
쿠바라는 명칭은 원주민 언어로 ‘중간지대’를 의미하는 ‘쿠바나칸(Cubanacan)’에서 유래했다. 쿠바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남미로 가는 중간 기착지이자 풍부한 문물이 모여드는 곳이었고,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섞여 들었다. 쿠바는 사탕수수 농장에 끌려 온 흑인 노예들의 리듬과 스페인의 선율이 만나 독특한 음악적 퓨전을 이뤄 왔다. 쿠바에선 현재 ‘손(son)’ 음악이 최고의 인기다. 1900년대 무렵 동부 오리엔테 지역에서 발생한 ‘손’은 살사의 모태가 된 음악이다. 손 음악의 다양한 퓨전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을 보기 위해 아바나의 명문클럽인 ‘카사 데 라 무시카(음악의 집)’를 찾았다.
이날 밤의 주인공은 젊은 여성 보컬이 등장하는 ‘밤 볼레오’. 아프리카 리듬에 색소폰, 트럼펫, 신시사이저까지 섞은 이 그룹은 현대적인 사운드로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높은 그룹이었다. 음악이 시작되자 공연장은 격렬한 살사 댄스의 춤판으로 변했다. 최신 그룹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은 머리가 희끗한 쿠바의 노인부터 젊은 흑인 여성까지 다양했다. 모든 세대와 인종이 함께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올드 아바나 시내의 골목 곳곳에서도 카페나 바에서 수준급 밴드의 연주가 끊이지 않는다. 봉고(크기가 다른 두 개의 작은 손북)와 마라카스(야자나무 열매의 속을 씨만 남기고 파내 만든 악기), 구이로(빨래판처럼 홈이 파인 호리병박 모양의 악기) 등 아프리카 리듬악기와 트레스(겹줄로 된 6현 기타), 색소폰, 바이올린, 플루트 등 악기 구성도 다양하다. 열대과즙처럼 쏟아져 나오는 흥겨운 댄스리듬에 흑인 여성이 길을 멈추고 한바탕 춤을 추자 큰 박수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 퓨전과 실험이 성공요인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전통음악의 세계적인 성공’이란 사실이다. 이 음반은 1959년 쿠바 혁명 이전의 전통음악만 담겨 있다. 그러나 쿠바인들은 ‘부에나…’의 음악만이 쿠바 음악의 전부인 줄 아는 시각에 불쾌감을 금치 못한다. 쿠바에는 그래미상을 받기도 한 40년 전통의 ‘로스 반 반’, 추초 발데스와 아라케레, 차랑가 하바네라, 아달베르토 이수 송, 밤 볼레오 등과 같은 실력 있는 뮤지션이 많지만 미국 내 음반 유통이 제한돼 있기 때문에 세계적인 프로모션이 힘들다.
하지만 경제봉쇄가 미국이 양산해 내는 팝 음악의 홍수에 휩쓸리지 않고 쿠바가 세기말 이후 전 세계 대중음악계의 트렌드로 떠오른 라틴 음악의 종주국이 된 배경이 됐다는 분석도 있다. 상업성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쿠바의 음악인들은 실력만 갖추면 장수하는 것이 특징이다. 국영방송국 라디오 프로그레소(Progresso)의 녹음 현장을 찾았을 때 56세의 PD 기예르모 빌라르 씨가 60대 가수 아달베르토 이수 송을 초청해 ‘2000년대의 젊음’에 대해 논하는 것이 무척 인상 깊었다. 피아니스트 추초 발데스의 아버지 베보 발데스는 90세의 고령에도 2년 후의 스케줄까지 꽉 차 있다고 한다.
빌라르 씨는 “변함없이 똑같은 음악을 하는 것은 쿠바 음악이 아니다”라며 “쿠바에서는 음반회사가 결정하는 트렌드가 아니라 아티스트가 자유롭게 실험하고 융합해 내는 음악이 주인공”이라고 말했다.
아바나=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클래식 대중음악 구분 않고 가르쳐
○ 영재 무상교육 쿠바국립음악학교
“쿠바에는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구분이 없어요. 오직 한 가지 음악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것은 ‘부에나 무시카(Buena Musica·좋은 음악)’입니다.”(호르헤 페르난데스 쿠바국립음악학교·ISA 부교장)
추초 발데스, 아달베르토 이수 송 등 세계적인 쿠바 뮤지션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ISA 출신이라는 점이다. 중남미에서 브라질과 더불어 ‘음악의 대륙’으로 일컬어지는 쿠바. 과연 쿠바의 음악교육 시스템은 어떻기에 이같이 훌륭한 뮤지션들을 배출해 낼까.
쿠바에서는 1960년대부터 국립예술학교를 세워 음악영재들에게 무상교육을 실시했다. 입학은 오디션을 통해 이뤄지며 재능 외에 어떠한 배경도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 페르난데스 부교장은 “혁명 간부나 유명 예술인의 자식도 오디션에서 떨어져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쿠바예술학교에서는 8세 때부터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중 한 가지를 배우고 고학년으로 올라가면 기타나 라틴 타악기, 그리고 다른 관악기를 익힌다. 클래식, 대중음악, 전통음악 등 장르를 구분하기 좋아하는 우리에게는 ‘부에나 무시카’란 이름으로 모든 장르의 음악을 함께 배우고 즐기는 시스템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총 16년간 음악교육을 받는 ISA의 졸업생들은 2년간 지방 오케스트라에서 자원봉사를 한 뒤 자기가 하고 싶은 밴드 음악 연주자로 나서게 된다.
페르난데스 부교장은 “며칠 전에 피아노과 여교수가 60세 생일을 맞았는데, 쿠바예술인협회에서 주최한 생일파티에 참석한 제자들이 종사하는 음악 분야가 다 달랐다”며 “똑같은 선생에게서 배운 학생들이 모두 다른 일을 하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이 학교 졸업생인 호세 카를로스(22·색소폰 연주자) 씨는 “세계 최고의 음악을 섞어야 하는 쿠바 음악을 잘하려면 클래식을 잘 알아야 한다”며 “졸업생들은 거리의 식당에서부터 밴드, 중등교사, 오케스트라까지 다양하게 일자리를 찾아 간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