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구멍 통과하려면 이력서 한 줄이라도 더 채우자” 각종 시험에 매달리고…
연세대 행정학과 4학년생인 이모(23·여) 씨의 5월 다이어리를 보면 일요일마다 각종 시험 일정이 빽빽이 적혀 있다.
이 씨는 다음 달 6일 컴퓨터활용능력시험을 시작으로 13일 한국어능력시험, 20일 국어능력인증시험을 치를 예정. 마지막 일요일인 27일에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과 토익이 겹쳐 어떤 시험을 치를지 고민 중이다.
그는 “취업준비생 사이에서 5월은 ‘죽음의 달’로 불린다”면서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능력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로 도서관이 만원”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취업 4종 세트’를 아시나요
해당 분야의 지식수준을 평가한다는 도입 취지와는 달리 능력시험이 취업 예비고사로 변질되고 있다. 취업준비생 사이에서는 ‘능력시험 스트레스’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최악의 취업난 속에서 높은 학점과 영어 실력은 기본이고 남들과 뭔가 다른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취업준비생들의 불안한 심리와 맞물려 능력시험 광풍(狂風)이 불고 있는 것.
고3 학생들이 내신, 수능, 논술을 ‘죽음의 트라이앵글’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취업준비생들은 학점, 토익, 인턴 경험 외에 최근 새로 준비해야 하는 각종 능력시험까지 합쳐서 ‘취업 4종세트’라고 자조적으로 부를 정도다.
중앙대 경영대 김모(23) 씨는 “높은 학점과 좋은 토익점수를 가지고도 취업에 실패한 선배들을 보면서 불안한 마음이 든다”며 “점수가 잘 나와서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추가할 수 있을까 싶어서 각종 능력시험을 본다”고 말했다.
한국언어문화연구원이 주관하는 ‘국어능력인증시험’의 경우 2001년 도입 초기 한 회 응시 인원은 수백 명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응시 인원은 2만 명에 달했다. 연구원은 올해 응시 인원이 지난해보다 50% 이상 늘어난 3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새로운 능력시험이 생길 때마다 취업준비생들의 불안감과 스트레스는 더욱 커지기 마련.
지난해 11월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이 생겨나자 공기업 취업 준비생들 사이에서는 “이제 역사 공부도 해야 하느냐”며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공기업 입사를 준비하고 있는 이종석(26·인천 연수구 연수동) 씨는 “공기업 입사를 준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능력시험이 생기기 전에 빨리 입사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며 한숨쉬었다.
○엇비슷한 능력시험 난립
기능별로 각종 능력시험이 10가지가 넘지만 엇비슷한 능력시험이 난립하는 것도 취업준비생을 힘들게 만들고 있다.
한자능력시험의 경우 한자능력검정, 한자자격검정, 실용한자, 한국한자검정 등 비슷한 능력시험이 6개에 이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포털사이트의 취업카페에는 ‘한자능력시험 도대체 어떤 것을 봐야 하나요’라는 내용의 질문이 많이 올라오고 있다.
한국어능력시험 역시 한국언어문화연구원(국어능력인증시험)과 KBS(한국어능력시험)가 각각 주관하는 시험이 있다.
연구원은 ‘언어사고력’을, KBS는 ‘실생활에서의 언어 능력’을 평가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밝히고 있지만 취업준비생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두 시험 중 어느 시험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취업준비생 김모(24·여) 씨는 “자신의 언어사고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 시험을 보는 응시생이 얼마나 되겠느냐”며 “단지 국어능력시험에선 1급, 한국어능력시험에선 900점 이상을 얻는 게 목표일 뿐”이라고 말했다.
시험당 응시료는 1만∼3만 원 수준. 하지만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여러 차례 시험을 치러야 하는 데다 봐야 할 능력시험이 여러 가지다 보니 취업준비생에게 응시료는 적지 않은 부담이 되고 있다.
다음 달 예정된 능력시험을 모두 보려면 응시료는 10만 원을 훌쩍 넘는다.
○능력시험이 입사보증수표 아니다
기업마다 일부 능력시험의 급수나 점수에 따라 가산점을 주고 있지만 능력시험이 입사 여부를 결정짓는 ‘보증수표’라는 데는 대다수 채용 담당자가 부정적인 의견을 나타냈다. 대부분의 능력시험이 업무 수행과 큰 상관관계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
취업준비생들이 불안한 마음에 근거 없는 루머에 휘둘리거나 지레짐작으로 능력시험 자격증을 따는 것이 취직에 유리하다고 여기고 있다는 것.
LG전자 인사담당자는 “온갖 능력시험에 매달린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어느 분야에서 일하고 싶은지 모르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해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전력의 채용담당자는 “능력시험의 경우 서류전형에서만 3% 정도의 가산점을 주고 있을 뿐 최종 합격과는 무관하다”며 “차라리 그 시간에 논술, 상식 등 필기시험과 면접 준비에 시간을 쏟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