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니서 베라크루즈까지… 그들만의 DNA
27일 오전 7시 반 서울 서초구 양재동 현대자동차 본사 1층 로비.
출근하는 사원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검은색 계열의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현관문을 들어섰다.
엘리베이터 앞으로 우르르 몰려갈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현대차의 ‘넥타이 부대’는 로비에서부터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서 탑승 차례를 기다렸다. 줄이 휘어지거나 한두 명이 옆으로 삐져나오는 경우도 거의 없다. 다른 대기업 본사에서는 목격하기 힘든 모습이다.
현대차에선 자연스러운 모습이지만 이 광경을 지켜본 외부인들은 적지 않게 어색해한다.
현대차 조직문화에 대해 증권사 연구원들이나 자동차산업 전문가들이 언급하는 단어는 ‘추진력’ ‘결집력’ ‘군대식’ ‘저돌적’ ‘뚝심’ ‘인간적’ 등이었다.
그러나 최근 변화의 바람이 조금씩 불고 있다. 글로벌기업에 필요한 시스템 경영과 창의력, 다양성 등이 강조되는 추세다.
현대차 직원들은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에 언제든지 튀어나갈 준비가 돼 있다. 현대차가 짧은 시간에 세계시장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저력이다.
수출 자동차는 국적성이 강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데 큰 힘이 되고 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때부터 내려온 상명하복과 군대식 문화의 전통은 지금도 현대차에 적지 않게 배어 있다.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은 아버지의 성격을 빼닮았다는 평을 듣는다.
1999년 말 정 회장은 회장으로 취임한 직후 미국을 방문했는데 현대차가 품질 문제로 미국 언론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미국 딜러들에게서는 “이대로는 차를 못 팔겠다. 품질을 개선해 달라”는 항의를 받았다.
자존심이 크게 상한 정 회장은 귀국한 뒤 곧바로 경영진 회의를 소집해 대책 마련에 나섰다. 미국 소비자 조사기관인 JD파워에서 컨설팅까지 받았다.
양재동 사옥 1층에 품질확보실을 마련해 수시로 품질회의를 주재했다. ‘품질 패스제’를 도입해 신차를 개발하는 단계마다 품질 수준을 평가해 합격점을 받지 못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했다.
미국시장에서는 10년 10만 마일 무상보증수리를 시작했다. 배수진을 친 것이다. 품질 개선을 위한 일련의 작업은 수개월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임원 A 씨는 “다른 회사 같으면 몇 년에 걸쳐 차근차근 진행될 일이었는데 현대차에서는 서너 달 만에 이뤄졌다. 전 직원이 미친 듯이 품질이라는 하나의 목표만 보고 움직였고 다른 것은 보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정 회장부터 일반 직원까지 똘똘 뭉친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JD파워 조사결과에 따르면 현대차의 초기 품질지수(IQS) 업계 순위는 2001년 32위로 바닥 수준이었지만 2004년 7위, 지난해는 3위로 뛰어올랐다.
미국 언론은 현대차의 품질 개선을 믿을 수 없는 일이라며 극찬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현대차 딜러인 ‘콜미어 현대’ 대표 존 피터슨 씨는 “몇 년 사이에 품질 문제로 시비를 거는 소비자가 거의 사라졌다. 현대차는 불가사의한 기업”이라고 말했다.
군대식의 상명하복과 어려울 때일수록 똘똘 뭉치는 결속력, 집중력이 이뤄낸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해 현대차에 들어온 신입사원 김모(28) 씨는 회의시간에 충격을 받았다. 회의를 주재하던 부장이 욕설에 가까운 단어까지 섞어 가며 한 부하를 나무라는 것이었다.
친한 선후배끼리는 ‘자식’ ‘인마’ ‘××’ 등의 호칭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한 전무가 사석에서 아이들을 다루듯 40대 중반인 차장의 뒤통수를 툭툭 치고 뺨을 꼬집는 모습도 목격했다.
그는 “모든 부서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부서는 상급자의 개성에 따라 그런 문화가 통용되고 있다”며 “다른 10대 기업에 들어간 대학 동기들에게 말했더니 놀라는 눈치였다”고 말했다.
박모(31) 대리는 “현대차는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보다는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편”이라면서도 “하지만 직원 간 친소 관계에 따라 업무 협조가 상당히 달라지는 것을 보면 시스템화가 미흡한 것 또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비공식적인 업무계통이 묵인되고 시스템을 떠나 사람과의 관계에 따라 업무의 처리 과정과 결과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
의사 결정이 빠르고 추진력이 뛰어난 이면에 거칠고 정밀하지 못한 조직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4월 비자금 사태와 2005년 초 노조의 채용비리 사건의 발생과 처리 과정에서 정밀하지 못했던 조직의 한계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런 사실을 인식한 탓인지 정 회장은 올해 신년사를 통해 시스템 경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뒤집어 얘기하면 그동안 시스템 경영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도요타 IBM 삼성전자 등 자타가 공인하는 글로벌기업은 이미 완벽에 가까운 시스템 경영을 하고 있다.
시스템으로 더 짜내려고 해도 짜낼 곳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 대신 창의력과 다양성 등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그러나 미국, 슬로바키아, 중국, 인도, 터키 등 5개국에 공장을 갖고 있고 190개국으로 자동차를 수출하는 현대차는 이런 면에서 아직 허점이 많다.
현대차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조직문화를 가진 기아차 출신 직원들을 무리 없이 소화하는 것도 과제다. 올해로 기아차를 흡수한 지 10년째지만 내부적으로 통합작업이 완료되지 못해 양사의 조직이 여러 차례 분리통합의 과정을 거듭하고 있다.
이 때문에 현대차는 지난해 맥킨지 등 일류 컨설팅회사에 경영혁신 방안을 의뢰했으며 최근에는 아예 컨설턴트를 3, 4명 영입하기도 했다.
현대차 관계자는 “컨설팅을 담당했던 컨설턴트들이 허술한 부분이 많은 상황에서 어떻게 지금 같은 성과를 이뤄냈는지 놀라워했다”며 “내부 혁신이 잘 진행되면 훨씬 좋은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고 전했다.
산업연구원 조철 연구위원은 “저돌적 추진력 등 기존 장점을 잃지 않으면서 고도의 시스템 경영을 갖추고 노조문제마저 해결한다면 글로벌화가 완결된 기업보다 발전 가능성이 높다”고 현대차를 진단했다.
석동빈 기자 mobidic@donga.com·이종식 기자 bell@donga.com
사진=지난해 9월 열린 현대차 ‘서머 페스티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