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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천재론]무서운 집중력…어려운 문제 붙들면 밤샘 예사

입력 | 2007-05-02 19:43:00

한국과학영재학교 3학년 김형록군. 최재호 기자


"선생님! 리포트를 영어로 써서 내도 될까요?"

대부분의 또래 친구들은 김형록 군의 이같은 갑작스런 발언에 당황스러웠다. "잘난 척 하는 것 아냐?" 몇몇 아이들은 수군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김 군에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믿기지 않는 얘기지만 김 군은 초등학교 때 1년 반 동안 미국에 살면서 영어에 완전히 적응했다. 지금도 국어보다 영어로 말하고 쓰는 게 더 편하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오니 이 '능력'이 오히려 학교생활에 걸림돌이 됐다. 심지어 말을 똑똑히 하라며 다그치는 선생님도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첫 학기를 마치고 성적표를 받은 김 군은 충격을 받았다. 중학교 때는 공부를 거의 안 해도 만점이었는데 여기서는 다르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까칠한 시선들…. 의욕은 점점 떨어지고 학교에 다니기가 싫어졌다.

천재는 외롭다. 남과 다르다는 것은 적어도 대인관계에서는 축복이 아닌 형벌에 가까울 수 있다. 천재적 재능을 가진 아이가 자폐나 대인기피증으로 스러지는 경우도 흔하다.

사실 부산 한국과학영재학교 3학년 김형록(17)군도 위험한 시기를 겪었다.

유창한 말솜씨와 똑 부러지는 성격 등 영재 하면 쉽게 떠오르는 이미지를 상상했는데, 그의 첫 인상은 그런 이미지와는 영 거리가 멀다. 서툰 말솜씨에 내성적인 성격. 수줍음 많이 타는 영락없는 시골 소년 같이 보였다.

그러나 김 군의 과학 실력은 전국의 영재들이 모인 이 학교에서도 두드러진다. 그는 3학년 학생 중 처음으로 지나 3월 미국 스탠퍼드대 입학 허가를 받아 조기졸업을 앞두고 있다.

김 군은 사실 입학 초기에 중퇴할 생각까지 할 정도로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를 구원해준 것은 '문제아'와 '천재'의 경계선상에 있었던 김 군을 알아보고 손을 먼저 내밀어준 선생님이었다.

●이해와 인정이 영재교육 필수조건

김 군의 1학년 담임이던 김영환 교사. 그는 김 군을 보고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천재 수학자 존 내시 교수를 떠올렸다고 한다. 내시 교수는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지만 수학 실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 점에서 김 군과 많이 닮았다.

김 교사는 김 군을 불러 차분하게 이런 저런 고민들을 들어줬다. 평소 아이의 행동을 자세히 관찰했다. 김 군은 어떤 일에 관심을 가지면 대단한 집중력을 발휘한다. 심지어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며 걷다 길을 잃을 때도 있다. 물리학이나 수학의 어려운 문제에 빠져들어 밤새도록 책을 읽는 게 다반사다.

"친구들과 얘기할 때 항상 조심스러웠어요. 말하다 보면 평소 생각하던 것처럼 영어나 전문용어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데, 어떤 친구들은 내가 잘난 척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김 군은 또 한번 정한 원칙은 꼭 지키는 올곧은 성격이다. 이 학교에는 학생이 직접 가르치고 시험까지 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수업이 있다. 일부 학생들은 답을 미리 공개해 동료학생들의 인기를 얻기도 하지만 김 군은 고지식하게 수업을 진행했다. 친구들의 시선이 고울 리만은 없었다.

김 군은 "초등학교 때 내가 친구들과 다르다는 걸 확실히 느꼈다"고 기억한다. 당시 또래 친구들의 대화는 TV 프로그램이나 영화, 컴퓨터게임, 여자친구 얘기가 대부분이었지만 김 군의 관심은 오로지 과학과 수학이었다.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못할 수밖에 없었던 것. 당시 김 군은 이미 고등학생 수준의 물리학이나 수학 책을 혼자 읽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결국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을 남들도 이해해줄 거라고 믿어버리는 게 문제였다. 김 교사는 김 군을 상담하면서 "나는 너를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너와 다른 사람도 많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려고 애썼다.

"형록이 성격으론 아무래도 국내 대학생활에 적응하기 힘들 것 같았어요. 그래서 빨리 졸업해서 유학 갈 준비를 하라고 권했습니다."

조기졸업과 유학이라는 목표가 생기자 김 군은 표정이 한결 밝아지고 의욕도 생겼다. 학생 서너 명이 한 그룹으로 과학의 특정 주제를 연구해 논문을 발표하는 자율연구 프로그램에서는 특히 두각을 나타냈다.

아버지인 강원대 IT학부 김용석(46) 교수는 "자율연구 프로그램에서 선생님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다음부터 자부심을 느끼고 스스로 더 열심히 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입학 초기 식당에서 항상 혼자 밥을 먹던 김 군에게 요즘은 단짝친구가 생긴 것도 눈에 띄는 변화다. 김 교사는 "아이의 심리를 이해하고 재능을 인정해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부모보다 교사 역할 커

사실 김 군은 과학영재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 변변한 영재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

어머니 최정희(46) 씨는 "5살 때 영재검사 결과 상위 0.1%가 나왔지만 영재교육은 커녕 집 근처에 마땅히 보낼 만한 학원도 없었다"며 "다행히 형록이의 재능을 알아본 초등학교 선생님 덕분에 한 학년을 건너뛰고 4학년에서 바로 6학년으로 올라갔다" 말했다.

그렇다고 부모가 따라다니며 열성적으로 공부를 시킨 것도 아니다. "솔직히 우리 부부는 형록이가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게 도와준 것밖에 없어요. 어려서부터 독서광이었거든요. 아이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발전할 수 있는 길로 이끌어준 건 과학영재학교의 선생님들입니다."

김 군이 교환교수로 발령받은 아버지를 따라 간 미국에서 학교생활에 처음 재미를 느낀 것도 선생님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다니던 중학교에서 한 선생님이 형록이에게 관심을 많이 가져줬던 게 아이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 교사 덕분에 김 군은 자신처럼 과학에 관심이 많고 잘 하는 학생끼리 모여 공부할 기회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고교 중퇴까지 생각하던 김 군이 유학을 결심한 데도 미국에서의 이런 기억이 크게 작용했을 거라는 게 부모와 교사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어요. 내 말을 이해해주는 친구들이 없었으니까요. 유학 가서 세계 각국에서 모인 뛰어난 아이들과 경쟁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흥분되는 것 같아요."

김 군의 꿈은 앨버트 아인슈타인이나 에드워드 위튼 같은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되는 것. 노벨상도 받고 싶단다.

김 교사는 "원칙을 세우면 손해를 보더라도 지키려고 하는 성격 덕분에 형록이는 도덕성을 갖춘 올바른 과학자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런 학생이 낙오되지 않고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제대로 키워내는 게 바로 교사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영재학교 교사들이 말하는 영재교육▼

영재들은 대체로 집중력이 남다르다. 뒤집어보면 관심 없는 분야엔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도 된다. '외골수' 기질이 강한 만큼 또래들과의 관계가 원만치 못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들을 교육시키는 데는 일반학생과는 다른 더 많은 관심과 배려가 뒷받침돼야한다.

현재 김형록 군의 담임을 맡고 있는 한국과학영재학교 정애영 교사는 "영재는 일반적으로 개성이나 자아가 강한 편"이라며 "실제로 영재학교 학생들은 일반 고교 학생들보다 단체로 움직이게 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한 가지 일에 대해 학생마다 의견이 다양하고 각자 주장도 뚜렷하다는 것. 정 교사는 "일일이 들어주고 취합해 최대한 많은 학생의 의견을 반영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영환 교사는 "우리 학교에서도 한 학년에 평균 두세명 정도는 사교성이나 사회성 등 성격 면에서 우려되는 아이들이 있다"며 "영재교육이 입시 위주가 아니라 이런 학생들이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게 이끌어주는 시스템으로 정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국내 영재교육 전문기관으로 초등학교나 중학교는 영재교육원, 고등학교는 영재학교가 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영재교육은 사실상 단절된 상황이다.

한국과학영재학교 정천수 교장은 "고등학교까지의 영재교육이 대학과 연결되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라며 "대학 2, 3학년 수준까지 공부하고 입학하는 영재들이 대학에 들어가 다른 학생들과 같은 교과목을 이수할 필요는 없다"고 지적했다.

임소형동아사이언스기자 soh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