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수근 대성그룹 창업주의 전기(위)와 고인의 생전 모습(아래).
1932년, 17세 청년 김수근은 대구 시내를 걷다 삼국석탄공사 대구지사의 구인광고를 발견하고 무작정 이 회사를 찾아갔다. 이 회사 직원들은 ‘일본인 회사이기 때문에 한국인을 받을 수 없다’며 그를 문전박대했다. 하지만 며칠을 계속 찾아간 끝에 결국 임시직원 자리를 얻게 됐다. 당시 지사장은 그에게 끈질기다는 의미로 ‘가죽 고리’라는 별명을 붙여 줬다. 김수근이 연탄 사업과 첫 인연을 맺은 계기다. 김수근은 1947년 대성그룹의 모태인 대성산업공사를 창업했다.
10일 창립 60주년을 맞는 대성그룹(회장 김영대)은 고 김수근(1916∼2001) 창업주의 전기 ‘가보니 길이 있더라’를 출간했다. 전기의 제목은 그의 일기 내용에서 따왔다.
이 전기에는 경영자의 추진력과 판단력이 어떻게 기업을 바꾸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많은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
○ 산소 사업 진출, 흑자까지 4년 뚝심으로 버텨
연탄 사업으로 성공한 김 창업주는 1979년 일본 기업과 합작으로 액체산소를 제조하는 ‘대성옥시톤(대성산소)’을 설립했다. 당시는 연탄 사업만으로도 잘나가던 시기였지만, ‘사시사철 되는 장사’를 찾아 신규 사업에 진출한 것. 장밋빛 전망으로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판로를 찾지 못해 고전했다. 적자가 쌓이자 임원 대부분이 “회사를 매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 창업주는 “회사를 팔지 말아야 한다”는 아들 김영대 씨의 말을 들었고 4년 만에 대성산소는 흑자 기업으로 돌아섰다. 이후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액체산소의 수요가 늘어나 대성산소는 전국에 27개의 공장을 가진 대기업으로 성장하게 됐다.
○ 신중함과 과감함, 경영자의 2가지 면
돌다리도 두드려 보는 신중한 경영도 김 창업주의 특징이었다. 그는 기업 성장의 토대가 된 문경탄광을 인수하기 전 대명탄광을 임차해 사업을 ‘연습’했다. 서울에너지를 위탁경영하면서 배운 노하우로 오산에너지 추진을 준비했다.
과감한 투자가 결실로 나타난 사례도 있다. 대성은 1980년대 말부터 리비아와 베트남 유전 개발에 참여했다. 그런데 이 해외 유전 개발이 성과를 거둔 것은 처음 투자로부터 약 20년이 지난 2000년대 중반이다. 리비아 유전이 2004년, 베트남 유전이 2006년에 생산을 시작했다. 과감한 투자가 뒤늦게 효자가 된 셈이다.
○ 대성그룹, 대성으로 사명 변경
대성그룹은 2일 사명(社名)을 대성으로 바꾼다고 밝혔다. 대성그룹은 2001년 2월 김 창업주가 작고하기 직전인 2000년 11월, 김 창업주의 세 아들이 각각 대성산업(김영대), 서울도시가스(김영민), 대구도시가스(김영훈)를 주력사로 해 계열 분리했다. 첫째 김영대 회장과 셋째 김영훈 회장은 계열 분리 이후에도 대성그룹이라는 이름을 같이 사용했지만 이번 사명 변경으로 확실히 구분지어지게 됐다. 대성은 지난해 매출 1조1800억 원, 순이익 770억 원의 실적을 올렸다.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