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두 남녀의 소통과 치유를 그린 ‘경의선’(10일 개봉)은 ‘역전의 명수’ 박흥식 감독(‘인어공주’ 박흥식 감독과 동명이인이다)의 두 번째 영화다. 제작을 맡은 박곡지 편집기사는 박 감독의 아내이다. 둘을 잘 아는 영화인이 그랬다.
“박 기사는 열 감기, 박 감독은 해열제”라고.
화끈한 여장부 스타일인 박 기사가 결국 지고 마는 유일한 사람이 박 감독이다.
지난달 30일 서울 광화문에서 이 부부를 만났다.
카페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의 박 기사와 조용히 “당신, 목소리가 너무 커. 그게 아니라…” 하고 끼어드는 박 감독.
옥신각신하다가, 서로를 치켜세우다가….
질문이 필요 없었다.
둘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대화를 이어 갔다. 》
○“아내가 제작자 역할 제대로 해 줬어요.”(박 감독)
‘역전의 명수’가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고전한 뒤 적잖은 마음고생을 했던 박 감독에겐 이후 맘에 드는 시나리오가 들어오지 않았다. ‘이럴 바엔 하고 싶은 얘기를 가지고 직접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시나리오를 썼다. 박 기사가 이를 1차로 ‘심사’해 ‘되겠다’는 확신을 줬다.
“잘나서가 아니라 운이 좋아서, 전 항상 중심에 있었어요. (그는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편집기사 중 한 명이다.) 영화로 살아왔지만 제일 중요한 건 가족이죠. 돈 벌기보다는 남편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에 이 영화를 만들었어요.”(박 기사)
저예산 영화로만 비칠까 봐 제작비도 잘 밝히지 않지만 충무로의 A급 스태프만 모였다. 박 기사의 덕이다. “제가 사기를 좀 쳤죠. ‘감독님이 한국에서 제일 잘하는 팀하고만 하겠다는데 우린 돈이 없어요. 어떡하실래요’ 하고요.”
남자 주인공 김강우가 지하철 기관사 역할이라 꼭 필요했던 선로나 열차에서의 촬영을 위해 도시철도공사의 허락을 받아낸 것도 박 기사다. 한 달 동안 매달려도 안 되던 일을 1주일 만에 해결했다. 누군가 감독을 힘들게 하면 뒤에서 ‘소리 없이’ 처리한 것도 박 기사다. “이 사람은 누구랑 얘기하든지 얘기가 먹히게 만드는 사람이에요.”(박 감독)
○“우리 집 찍는다면 어떻게 편집할까 상상하죠”(박 기사)
영화에는 박 감독의 체험이 많이 담겨 있다. 서울대 독문과 출신으로 독일 유학을 다녀온 경험을 살려 여주인공이 독문과 강사로 나온다. 그는 예전에 부산 태종대에서 자살할 것 같은 여성을 목격한 적이 있는데 그 여성이 비슷한 처지의 남자와 대화하다 상처를 드러내는 이야기를 구상하면서 전체적인 구성을 짰다.
‘경의선’은 주인공들이 만나는 곳이며 끊어졌지만 곧 이어질 철도. 철도가 이어지듯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고, 둘은 서로를 치유한다. 박 감독이 생각하는 인생이나 결혼의 의미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영화는 두 남녀의 현실적인 고민들을 구체적으로 묘사해 생명력을 얻었다. 그런 현실 인식도 물론 박 감독의 체험적 결론이다.
영화에서 자신이 ‘무가치한 인간 같다’는 한나(손태영)에게 선배 언니는 “결혼해서 애 낳으면 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변한다”고 말한다. 박 감독은 “젊었을 땐 ‘삶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추상적으로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이들 보면 ‘이것들 교육하려면 돈 많이 벌어야지’ 하고 구체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며 웃었다. 박 기사가 거들었다.
“우리 집의 상황을 영화로 찍는다면 어떻게 편집할까 상상했어요. 애들 아빠는 막 뛰고, 애들이 ‘아빠 힘내세요’ 하고 노래하는 것 교차편집으로 넣고. 에이, 영화가 되든, 안 되든 우리가 영화 만들면서 이렇게 행복한데요, 뭐.”
10년을 같이 산 부부에게서 ‘구체적인 행복’의 냄새가 났다.
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
■‘경의선’ 어떤 영화?
성실한 지하철 기관사 만수(김강우)는 어느 날 자신의 열차에 한 여성이 투신자살하면서 큰 충격을 받는다. 대학 독문과 강사인 한나(손태영)는 같은 과 유부남 교수와 유학 시절부터 지속해 온 연인 관계 때문에 위기를 겪게 된다. 너무 다른 환경에서 살아 마주칠 일도 없었을 두 남녀는 각자 절망 속에서 경의선 열차에 몸을 싣는다. 눈 오는 밤, 경의선의 남쪽 종착역인 임진강역에서 마주친 둘은 자신에 대한 거짓말로 말문을 연다. 거짓으로 시작한 대화가 점점 진실로 다가가고, 두 사람은 상대방의 상처를 들으며 자신의 상처를 치유한다. 작년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돼 호평을 받았다.
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