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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화제! 이사람]모비스의 ‘마당쇠’ 우지원

입력 | 2007-05-05 03:01:00

우지원이 챔피언결정전 2차전에서 패스할 곳을 찾고 있다. 통합 우승이 확정된 뒤 부인 이교영 씨에게 키스하고 있는 우지원. 그물망을 자른 뒤 우지원이 림에 매달려 환호하고 있다(위 사진부터). 연합뉴스


1일 울산 동천체육관. 모비스의 프로농구 우승을 알리는 축포가 터지자 그는 유재학(44) 감독을 번쩍 안아 올렸다. 그리고 관중석으로 뛰어가 부인 이교영(29) 씨를 끌어안고 입맞춤을 했다. 셋 모두 울었다.

림 그물을 가위로 잘라 내는 ‘우승 세리머니’. 그는 자신의 차례가 되자 림을 흔들며 고함을 질렀다. 평소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우지원(34·사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너무 기뻤다”고 말했다. 3일 서울에서 그를 만났다.

○ 꽃미남과 황태자

193cm의 키에 군살 없는 몸매, ‘주먹만 한 얼굴’. 우지원은 잘생겼다. 대학 시절부터 여학생 팬들을 몰고 다녔다.

“1992년 1월 경복고 3학년 때 연세대 소속으로 농구대잔치에 나갔어요. 기아랑 맞붙었는데 당시 기아에는 허재, 강동희 등 그야말로 스타가 즐비했고 연대에도 문경은, 이상민 등 뛰어난 선배가 많았죠. 그런데 최희암 감독님이 저를 내보내면서 편하게 슛을 쏘라고 하셨어요. 건방지게 보이지 않을까 고민했는데 기회가 오니 몸이 저절로 움직이더라고요. 그날 지긴 했지만 꽤 많이 넣었어요.”

다음 날 깨어났을 때 그는 스타가 돼 있었다.

그의 대학 시절 연세대는 최고의 전성기였다. 그런 팀에서 그가 ‘궂은일’을 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우아한 폼으로 적당한 시기에 3점슛을 넣어 주면 팬들은 열광했다. ‘코트의 황태자’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 유재학과 마당쇠

우지원은 연세대 코치였던 유 감독과 프로(대우·현 전자랜드)에서도 만남을 이어 갔다. 우지원이 2001년 삼성으로 팀을 옮기면서 잠시 떨어졌던 두 사람은 유 감독이 2004∼2005시즌을 앞두고 모비스로 오면서 다시 만났다. 모비스는 유 감독이 오기 직전 3시즌 동안 꼴찌를 두 번이나 한 ‘동네북’이었다. 유 감독은 팀을 다시 만들었고 수비가 약한 우지원은 벤치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늘었다.

“솔직히 서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감독님을 원망하지는 않았어요. ‘스타 의식’을 버리라는 말씀에 제가 맞춰 가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는 조금씩 몸싸움과 악착같은 수비 등 음지의 역할에 익숙해져 갔다.

“우승하고 난 뒤 KTF 신기성과 통화를 했는데 ‘형은 별로 중요한 때가 아닌데도 골 넣을 때마다 오버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그런 행동이 팀에는 힘이 되고 상대를 거슬리게 하는 건데…. 나름대로 성공했죠. 하하.”

우지원은 올해 처음으로 식스맨상을 받았다. 유 감독이 그를 ‘마당쇠’로 만들었다.

○ 첫 우승 그리고…

프로 우승과 인연이 없었던 우지원은 KTF와의 챔피언결정전 내내 투혼을 불살랐다. 7차전 때는 고비마다 터뜨린 3점슛 3개를 포함해 14득점을 하며 우승에 기여했다. 처음 맛본 우승은 그래서 더 달콤했다. 우승 세리머니는 ‘10년간 쌓였던 한이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아내가 부산과 울산을 오가느라 경기 성남시 분당에 있는 집에는 아예 못 갔어요. 우승하는 날도 저 대신 팬클럽 회원들에게 식사 대접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으로 아내에게 우승 반지를 선물하게 돼 체면이 섰어요.”

우지원은 2000년 만난 이교영 씨와 2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지금은 네 살짜리 딸 서윤이의 아빠이기도 하다.

“아직 체력은 자신 있어요. 10분 출전한다면 그 시간 동안 40분 뛸 힘을 쏟아 부으면 되지 않을까요. 우승을 하고 나니 그동안 해 왔던 농구가 새롭게 보여요. 후배들 챙겨 가면서 코트에서 쓰러질 때까지 선수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이승건 기자 why@donga.com

사진=이훈구 기자 uf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