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를 극복하고 성악가의 길을 걷고 있는 이소영(한국예술종합학교 성악과 2년·왼쪽) 씨가 가난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도록 이끌어 준 어머니 고경애 씨에게 카네이션을 달아 준 뒤 활짝 웃고 있다. 석동률 기자
■ 어버이날 맞아 책 펴내
생후 6개월의 어린 소영은 눈에 붕대를 감고도 너무나 평온했다. 눈을 가리고 있을 때나 가리지 않았을 때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증거였다. 소영에게 내려진 진단은 선천성 백내장. 소영의 시각장애 판정은 온 가족에게 가혹한 선고였다. 세 살 터울인 언니마저 정신지체 3급 장애인이었기에 절망감은 더했다.
하지만 소영에게는 눈이 없는 대신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어떤 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서 고유의 음높이를 판별하는 ‘절대음감(絶對音感)’을 가지고 태어난 것.
눈이 없는 대신 특별한 귀를 가진 아이. 가난과 좌절을 딛고 200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합창지휘과에 수석 입학해 음악가의 길을 걷고 있는 이소영(25) 씨가 어버이날에 맞추어 최근 자서전을 펴냈다.
자서전 ‘그래요, 눈이 없는데 귀가 있더라고요’(출판사 맹모지교)에서 그는 어머니에게 평소 하지 못했던 쑥스러운 말들을 쏟아냈다.
“엄마, 고마워요. 버리지 않아서 고맙고 키워 줘서 고맙고 음악 할 수 있게 해 줘서 고맙고. 이 다음에는 내가 엄마 눈이 되고 손이 되고 발이 되어 줄게요.”
어머니 고경애(59) 씨는 소영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키우고 싶어 했다. 두꺼운 안경과 사시 때문에 아이들의 놀림감이 될 것을 알면서도 정상인 학교를 고집했다.
하지만 소영이 열 살 때 갑자기 찾아온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머니는 자꾸만 약해져 갔다. 소영이 21세 되던 2003년 여름. 한계상황이 왔다. 어머니 사업이 모두 실패로 끝나 집은 경매로 넘어가기 직전이었고 어머니는 신용불량자가 됐다.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어머니는 “같이 죽자”며 살충제 뚜껑을 열었다.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막상 죽음이 코앞에 닥쳐오자 생이 너무나 아까웠다.
“엄마, 안 죽으면 안 돼?” 정적이 흐르고 세상이 정지됐다. “우리 아직 할 일이 있잖아.” 세 가족은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어머니와 소영은 반드시 음악가로 성공하자고 이를 악물었다. 결국 소영은 200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합창지휘과에 수석 합격했으며 지금은 과를 바꿔 성악과 2학년에 재학 중이다.
불행과 행복은 이렇게 늘 교차하며 찾아왔다. 2005년 희미하던 오른쪽 눈이 실명 판정을 받고 나자 신기하게도 왼쪽 눈의 시력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요즘도 가계는 늘 빠듯하다. 언니가 노인복지타운에서 벌어오는 70만∼80만 원이 수입의 전부다. 하지만 희망을 포기했더라면 지금의 가족도 없었을 것이다. 소영 씨는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희망은 없는 것이 아니라 찾지 않기 때문에 없어 보이는 것뿐”이라고.
김현지 기자 nu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