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히잡을 착용하면 관공서에 출입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의 아내가 남성 의사에게 진찰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프랑스)는 당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1월 31일 방송된 언론 인터뷰에서)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도 거침이 없다. 여러 현안의 해결 방식도 급진적이지만 직설적인 화법부터가 니콜라 사르코지(52) 프랑스 대통령 당선자의 성격을 잘 보여 준다.
그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로 이주한 헝가리 귀족 출신. 어머니는 유대계 그리스인이다. 프랑스인의 피가 섞이지 않은 그가 프랑스의 방향타를 쥐게 된 것은 혈통보다 능력을 선택한 프랑스 국민의 승리이자 ‘자유 평등 박애’를 내걸었던 프랑스 혁명 정신의 승리로 평가된다.
그는 10대에 느꼈던 열등감이 현재의 성격, 정치인으로서의 성공을 이끌었다고 자평한다. 키가 작다는 것, 궁핍한 생활, 부모의 이혼이 그것. ‘키 콤플렉스’는 지금도 여전한 듯하다. 선거 캠프의 공식 답변이 ‘170cm가 조금 안 된다’는 것이고 보면 그의 키가 ‘일급 국가 기밀’이 될 것이라는 우스개도 자연스럽게 들린다.
7세 이래로 그의 평생 염원이던 대권 의지는 4년 전 인터뷰에서 공개됐다. ‘하루 종일 대권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면도할 때만 빼고”라고 답변한 것. 그래서 나폴레옹에게 빗대 ‘사르코지옹’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주요 프랑스 정치인과 다른 길을 걸어 온 ‘정치적 이단아’였다. 주요 정치인의 등용문인 엘리트 양성학교 그랑제콜과도 인연이 없었다. 파리10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한 뒤 변호사로 활동한 그는 집권 우파의 정당원으로 잡초 같은 정치 인생을 개척했다.
훗날 대통령이 되는 자크 시라크가 이끄는 우파 정당에 19세의 나이로 발을 디딘 그는 한때 시라크의 막내딸과 사귀면서 ‘시라크의 정치적 아들’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가 처음 대중의 눈에 띈 것은 파리 근교 뇌이쉬르센 시장이던 1993년 5월. 그는 한 유아원에 침입한 인질범을 직접 설득해 아이들을 무사히 구출한 뒤 스타로 떠올랐다.
1995년 대선에서 에두아르 발라뒤르 총리를 지지한 뒤 시라크와 사이가 멀어졌으나 2002년 총선에서 대중운동연합(UMP)의 압승을 이끌었다. 총리 발탁이 유력시됐지만 그를 견제한 시라크 대통령은 사르코지를 내무장관에 기용했다. 그는 강력한 범죄 척결 정책을 선보여 치안 상황에 불안해하던 중산층 시민의 지지를 끌어 모으며 이를 기회로 활용했다.
그러나 그가 받는 반감과 비난도 상당하다. 특히 2005년 아랍계 이민자 소요 사태 이후 대도시 교외 빈민가의 이민자들은 그에 대한 반감을 감추지 않는다.
독특한 그의 결혼생활과 배우자도 관심거리다. 모델 출신의 홍보 전문가로 두 번째 부인인 세실리아 씨는 올해 초 인터뷰에서 “나 자신을 퍼스트레이디로 생각하지 않는다. 지루하니까”라고 말한 뒤 “전투복 바지에 카우보이 부츠를 신고 돌아다니는 게 좋다. 틀 속에 맞추는 것이 싫다”고 토로했다.
자유분방한 언행을 입증하듯 세실리아 씨는 한때 남편과 별거하고 미국에서 연인과 동거하다가 2005년 사르코지 곁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사르코지도 여기자와 로맨스를 즐겼다.
재결합 후 세실리아 씨는 남편의 선거본부에서 기획과 홍보를 맡았지만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6일 밤에 열린 당선 축하 행사에 나타났다.
한편 고단한 선거전을 환호 속에 마무리한 사르코지 당선자는 3일간의 피정(避靜)을 계획 중이라고 프랑스 언론이 전했다. 외진 수도원에서 묵상과 기도를 하며 대통령으로서의 대(大)구상을 그려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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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