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직장여성 A씨는 갈등한다. 짙은 핑크 원피스냐 블랙 정장이냐. 그의 내부에선 두 종류의 자아가 충돌한다. 욕구에 충실한 자기와 상대가 바라보는 자기. 미국 사회심리학자 조지 미드의 설명을 빌리자면 ‘I’와 ‘Me’의 갈등이다.
I가 사회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충동적 자아라면 Me는 사회 속의 나다. 옷차림에는 I와 Me가 뒤섞여 있다. 규범에 충실한 A씨는 결국 블랙 정장을 택할 것이다. 대신 핑크색 시계나 붉은색 하이힐로 I를 드러낼 수 있다.
I의 요소가 강할수록 사람들은 그의 성격이 독특하다고 느낀다.
#2.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은 유독 모자를 좋아한다. 여왕이 이번 미국 방문 길에 가져간 모자만 한 트럭이라는 소문도 있다.
모자는 예로부터 ‘신분증’ 역할을 해왔다. 대개 머리 장식이 크고 화려할수록 우두머리를 뜻했다. 모자를 좋아하는 여성은 신분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유형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는 중요한 대회의 마지막 경기에선 언제나 붉은 계열 옷을 입는다. 전투력을 과시하고 상대를 주눅 들게 하기 위해서다. 패션을 전략적으로 활용한 사례다. 뉴욕 월스트리트의 뱅커들도 중요한 계약에선 붉은 계열 넥타이를 많이 맨다.
#3. 의상심리학자들은 ‘비정상적’인 옷의 유행은 불안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불길한 사건의 조짐이라는 것이다. 나폴레옹의 아내 조세핀은 옷의 허리 라인이 사람의 허리보다 위에 있는 ‘엠파이어 드레스’를 유행시켰다. 그 후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패해 유배당했다. 1920년대에 허리 라인이 골반 밑으로 내려간 ‘플래퍼’ 원피스가 유행한 후에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최근 유행인 하이웨이스트 및 실루엣의 역전 현상도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불안한 마음을 나타낸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입고 싶은 옷과 입는 옷, 그 차이의 심리학
《 인간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옷을 입고 장식하는 존재다. 옷은 사회적이면서 주관적이다. 자기가 옷을 선택하지만 색다른 옷을 통해 자신이 변하는 것도 느낀다. 스타일로 옷 입는 사람의 기분 전환뿐 아니라 마음의 치료까지 가능하다는 이론이 존재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국내에 의상심리학 분야를 소개한 이인자 건국대 명예교수 겸 서경대 석좌교수는 “패션은 사회현상의 반영이자 개인의 성격과 전략, 심리를 보여주는 매개체”라고 설명했다.》
○ 옷으로 사람 읽기
이 교수가 소개한 일화.
서울역에서 부산행 열차에 탄 두 젊은 남자가 앞에 앉은 개나리색 원피스 차림의 여성을 두고 내기를 했다.
“기차가 안양을 지나자마자 이쪽으로 걸어올걸.”
다른 친구는 전혀 근거 없다며 흔쾌히 내기에 응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일어선 여자는 남자들을 지나 화장실 쪽으로 갔다.
“노란색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는 색이에요. 남이 봐 주길 원하는 과시형이 노란색을 좋아하죠. 붉은색은 충동적인 성향, 초록색은 이지적인 사람으로 볼 수 있어요.”
색으로 사람을 읽으려면 꾸준히 한 가지 색에 집착하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패리스 힐턴과 같은 핑크 마니아는 낭만적이고 감정적이며 공주를 동경하는 성격으로 읽힌다.
이 교수는 “보라색과 검은색은 마음의 병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며 “갱년기 위기를 겪는 40, 50대의 주부가 갑자기 보라색 옷을 찾는다면 주변에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색, 장식, 디자인 등 다양한 요소를 통해 전형적인 성격 유형을 꼽아 봤다.
☞빨강 립스틱형=어디서나 눈에 띄는 화려한 여성. 이런 여성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패션빅팀(victim·과도하게 유행을 좇는 사람)형. 아무리 더워도 유행이라면 웨스턴 부츠를 신는다. 두 번째는 나홀로형. 남들이 뭐래도 내가 좋으면 한다.
→ 이 교수에 따르면 패션빅팀형은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유행은 심리학 용어로 ‘동조현상’으로 볼 수 있다. 남들 사이에 끼지 못하면 불안해하는 성격이다.
나홀로형은 말 그대로 내 뜻대로 살겠다는 형. 아무도 막지 못한다.
☞헐렁 검정 재킷형=학교나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았으나 촌스러운 형. 멋 부리는 여자를 한심하게 여긴다. 하지만 일부는 마음 깊은 곳에서 빨강 립스틱형을 동경하기도 한다.
→ 박스형 슈트를 즐기는 사람은 정치적인 성향이 강한 편. 목적의식이 뚜렷하고 승부욕이 있다. 때로는 외모에 열등감을 느끼기도 한다. 드라마 ‘히트’의 강력계 여형사 고현정이나 영화 ‘당신이 그녀라면’의 변호사 토니 콜레트는 섹시한 구두를 모아 집에 전시해 둔다.
☞리본 프릴형=리본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 여성. 하늘하늘한 소재를 좋아하는 스타일로 여성스러워 보이길 원한다.
→ 동양 여성 중에 리본 프릴형이 많은 편. 여성적이고 부드러운 성격이거나 그런 성격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여성스러움이 미덕으로 꼽히는 한국과 일본에서 공주형 옷이 잘 팔리는 것과도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있다.
○ 스타일로 마음 치료
“패션 컨설팅은 4가지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색, 디자인, 개성, 라이프스타일을 두루 봐야 하죠.” (디자이너 케이 킴)
패션은 성격을 반영하지만 때로는 성격 자체를 바꾸기도 한다. 실제로 정신병원에서 화장 패션쇼 등의 ‘실험’을 통해 환자의 존재감을 되찾게 한 사례도 있다.
케이 킴은 오트 쿠튀르(맞춤복) 숍을 운영하면서 주요 고객의 ‘스타일 치료’를 해왔다. 고객의 마음을 잘 읽기 위해 패션컨설턴트 분야를 공부했다.
그는 “아무리 남이 예쁘다고 해도 입으면 뭔가 어색할 때가 있을 것”이라며 “내부의 자신과 의상의 목적이 맞아야 진정한 자기 스타일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케이 킴의 도움을 받아 두 가지 유형의 여성을 ‘치료’해 봤다.
☞빨강 립스틱형=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이경은(27) 씨는 171cm의 키에 훤칠하고 늘씬하다.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와 구리빛 피부가 멀리서도 눈에 띈다. 명문대를 졸업한 이 씨는 국내 대기업엔 이력서도 안 냈다.
“보수적인 분위기를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어요. 일부러 외국계에 지원했죠.”
‘섹시하다’는 말이 듣기 좋다는 이 씨는 가끔 옷차림에 대해 상사의 지적을 받을 때도 있다고 한다. 키가 커서 치마를 입으면 ‘미니’로 보여 지적을 받는다. 평소에는 민소매 셔츠와 커다란 귀걸이, 스모키 메이크업(눈두덩이까지 회색으로 칠하는 것)을 즐긴다. 유행보다는 개성을 중시하는 형. 자신감이 있고 사교성이 좋은 편이다.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면서도 어떻게 하면 커리어우먼처럼 보일 수 있을지가 고민.
“창조적인 성격입니다. 트렌드 세터죠. 다만 비즈니스에선 ‘예쁜 아가씨’가 아닌 ‘믿을 만한 사람’으로 비쳐야 해요. 그렇다고 개성을 죽이면 본인이 괴롭죠.” (케이 킴)
처방은 개성 있는 비즈니스 우먼.
메이크업은 스모키를 피하고 부드러운 컬러로 단정함을 연출하는 게 관건. 입술은 연하게 하고, 눈썹 끝부분이 치켜 올라가지 않게 부드럽게 라인을 그렸다. 곱슬머리는 고데기로 펴서 깔끔하게 뒤로 묶을 것을 권했다.
의상은 화사한 민트색 정장을 택했다. 하체에 자신이 없는 이 씨는 치마를 별로 입지 않았다. 그래서 골반 라인에 맞춰 허벅지가 날씬해 보이는 A라인을 골랐다. 재킷의 색상과 지퍼, 시폰 장식으로 ‘빨강 립스틱형’ 성향도 드러냈다.
채도가 낮은 감색 원피스도 입어 봤다. 색은 톤다운 됐지만 디자인이 멋져 섹시하다.
☞헐렁 검정 재킷형+리본 프릴형=홍보대행사인 시삽 미디어 강은경(41) 사장은 여성적으로 보이는 게 싫었다. 여성 사업가로서 남자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격은 여성적. 정장에 리본 블라우스를 입는 등 가끔 숨겨진 개성이 튀어나온다. 그래서 전체 분위기와 의상이 어긋날 때가 많다. 바쁜 일정과 스트레스로 생기가 없어 보이는 게 고민.
“리본 블라우스와 빨강 카디건…. 마음속엔 불이 타오르는 사람이란 증거죠. 그런 사람이 마음을 죽이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에너지를 끌어올려 생기 있으면서 자신감 넘쳐 보이는 동시에 여성스러운 느낌을 드러내는 게 좋겠어요.” (케이 킴)
강 사장은 머리 스타일부터 손을 댔다. 머리가 다소 부스스해 피곤해 보인다는 말을 듣곤 하기 때문. 뒷머리에 볼륨을 넣어 숱이 많아 보이게 했다. 길이는 그대로 하되 웨이브를 넣어 활발한 느낌을 냈다.
메이크업은 여성적인 분위기. 피부 잡티를 커버하고 입술은 풍부한 느낌을 살리면서 연하게 그렸다. 코는 높아 보이게 하고 눈은 연한 핑크빛 섀도를 그렸다.
의상은 가벼운 감색 바지 정장을 권했다. 재킷은 강 사장의 단점인 허리와 복부를 커버하기 위해 살짝 라인이 잡혔다. 키가 커 보이려면 짧은 재킷에 긴 하의를 입는 게 방법.
생기 있고 활발한 에너지를 표현하기 위해 큰 체크무늬를 택했다. 강 사장의 장점인 예쁜 어깨를 강조한다.
케이 킴은 “많은 사람이 단점을 숨기는 방향으로 옷을 입지만 자신의 장점을 찾아 강조하는 게 전체 스타일의 점수를 높여 준다”며 “장점을 부각하면 자신감도 커진다”고 설명했다.
‘나는 복부가 문제야’ 식으로 한탄하기보다는 ‘나는 상체가 으뜸이지’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자세가 멋진 스타일을 연출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글=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 영화-드라마 속에선 ‘패션=캐릭터’▼
요즘 주부들 사이에서 화제의 드라마는 단연 SBS ‘내 남자의 여자’다. 남편이 친구와 바람났다는 충격적인 소재 때문.
이 드라마는 패션업계에서도 화제다. 극중에서 친구의 남편을 유혹하는 역을 맡은 탤런트 김희애에게 속옷 하나라도 더 협찬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김희애가 연기하는 자유분방한 성형외과 의사 ‘화영’의 사전엔 금기(禁忌)가 없다. 그래서 패션도 파격적이다. 한번쯤 백화점에서 만지작거렸을 법한 핫 핑크 드레스, 섹시한 란제리 룩, 강렬한 붉은색 트렌치코트, 최신 명품 가방. 간간이 지적 분위기의 정장도 등장한다. 보통 여자들이 하고 싶어도 감히 하지 못했던, 할 수 없었던 모든 것을 입고 나온다.
드라마와 영화 속 패션은 캐릭터의 성격을 묘사하는 훌륭한 도구다. 삼성패션연구소 김정희 과장은 “사람들은 짧은 순간 무의식중에 옷차림을 보고 상대의 성격과 라이프스타일을 판단한다”고 설명했다. 김 과장이 영화 속 캐릭터별 옷차림의 특징을 소개했다.
여자
☞노처녀 & 촌스럽고 어눌한 성격=색깔이 절대 튀지 않는다. 성격이 분명해 보이는 색을 배제하고, 주변인처럼 보이게 하는 옅은 색을 많이 쓴다. 진한 색을 쓸 때는 주로 짙은 갈색.
소재는 니트나 면 소재의 옷이 많다. 칙칙한 색상의 카디건이 대표 아이템. 이런 여성은 슈트를 입어도 브라운이나 베이지색을 좋아한다. 어쩌다 멋을 내면 지나치게 노출하거나 색깔 배합이 이상해 ‘오버했다’는 느낌을 주기 십상이다. 베드신에서 보이는 속옷은 언제나 베이지색. 머리 스타일은 평범한 웨이브가 많다. 대표적인 캐릭터는 영화 ‘브리짓존스의 일기’와 ‘미녀는 괴로워’, ‘사브리나’의 변신 전 모습.
☞도시 커리어우먼 & 팜므파탈=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 ‘키핑 더 페이스’는 도시 커리어우먼 패션의 정석이다. 여주인공의 옷은 캐주얼도, 정장도, 파티복도 올 블랙이거나 올 화이트다. 옷이 몸에 붙어 몸매를 강조하며 군더더기가 없다.
팜므파탈의 전공색도 블랙이다. 타이트한 블랙 스커트, 코르셋으로 조인 듯한 가는 허리, 하이힐이 전형적인 아이템. 자연스런 머리는 사절. 화장기 없이 새하얀 얼굴에 붉은 립스틱으로 멋을 내기도 한다, ‘타짜’의 김혜수를 상상하면 된다. 거친 여성은 가죽소재를 즐긴다. ‘킬빌’의 우마서먼은 가죽 재킷을 입고 칼을 휘두른다. ‘니키타’의 킬러, ‘매트릭스’의 여주인공도 마찬가지.
남자
☞작업남=영화 ‘나를 책임져 알피’ ‘오션스 일레븐’을 주목하라. 대개 넥타이를 바짝 조여 매지 않고 느슨한 듯 편안한 스타일을 표현한다. 몸에 맞춘 듯 라인에 딱 떨어지는 스트라이프 슈트를 많이 입는다.
☞평범한 샐러리맨=양복을 입었지만 어딘지 어색하다. 남의 옷을 입은 듯 어깨가 크거나 상의와 하의가 따로 노는 분위기. 기성복을 싸게 구입한 것을 묘사하기 위해서다. 더 답답한 캐릭터를 표현할 때는 뿔테 안경이 등장한다. 영화 ‘공공의 적 2’의 의상을 담당한 스타일리스트 오경아 씨는 “정의감에 불타는 가난한 검사 설경구는 헐렁하고 어두운 기성복 슈트 위주로 입혔다”고 설명했다.
반면 범인이지만 세련된 역의 정준호는 셔츠까지 몸에 꼭맞는 맞춤복. 부자 검사는 스트라이프 셔츠와 화려한 넥타이, 커프스 링크 등으로 멋을 냈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