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 전 물건을 쓰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런데 300년 전 작곡된 클래식은 여전히 연주되며 감동을 준답니다.” 첼리스트 장한나 씨가 지휘자로 데뷔해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를 연다. 사진 제공 EMI
지난달 말 첼리스트 장한나(25) 씨는 큰 슬픔에 잠겼다. 자신을 친딸처럼 아껴주던 스승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가 타계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11세의 나이로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국제콩쿠르에서 대상을 탔을 때 스승은 장한나를 프랑스 파리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선생님이 저를 꼭 안아준 뒤 하신 첫마디는 ‘한 달에 4번 이상 연주하지 마라’는 것이었어요. 당시 수많은 매니지먼트사와 음반사에서 연락이 와서 정신을 차릴 수 없던 때였죠. 선생님은 제게 ‘보통 학교에 다니면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놀면서 정상적으로 자라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죠. 제가 늘 음악의 초심을 잊지 않는 것은 선생님 덕분입니다.”
어느덧 성숙한 숙녀로 변모한 그가 거장 첼리스트 겸 지휘자였던 스승 로스트로포비치의 뒤를 이어 지휘자로 데뷔한다. 그는 누구보다 어린 학생의 재능을 아끼고 사랑했던 스승을 기리기 위해 국내에서 어린이를 위한 음악회도 개최한다.
○ 이달 말 韓中獨 연합오케스트라 이끌어
장 씨의 지휘자 데뷔 무대는 22∼27일 경기 성남아트센터가 주최하는 제1회 ‘성남국제청소년관현악축제’의 마지막 날에 열린다. 그는 한국과 중국, 독일의 청소년 교향악단 단원들로 구성된 연합오케스트라를 이끌 예정이다. 또한 장 씨는 올 여름방학부터 내년 겨울방학까지 베토벤 교향곡 전곡(9개)을 지휘하는 프로젝트도 진행한다. 서울시향, 제주시향, 서울 청소년교향악단 등과 함께하는 ‘청소년 음악회’는 MBC를 통해 15차례에 걸쳐 방영될 예정이다.
현재 독일에 머무르고 있는 장 씨와 전화 인터뷰를 했다. 그는 독일에서 베토벤의 삶과 흔적을 따라 여행 중이다. 그는 “본에 있는 베토벤의 생가에 들르고, 베를린 도서관에서 베토벤의 친필 악보를 구해 보면서 교향곡 지휘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첼리스트인데 왜 갑자기 지휘자로 나설 생각을 했는가.
“음악가는 끊임없이 도전해야 한다. 클래식의 가장 위대한 악기는 오케스트라다. 첼로를 통해 나만의 음악을 완성해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손과 마음을 빌려 최상의 화음을 만들어 내는 것도 매력적이다.”
―지휘 공부는 언제부터 준비해 왔나.
“4년 전부터 미국 줄리아드음악원 지휘과의 제임스 디프리스트 교수에게 지휘법을 배워 왔다. 무엇보다 13년간의 무대 경험이 진정한 스승이다. 거장 지휘자들과 협연할 때는 협주곡뿐 아니라 지휘자의 교향곡 리허설도 즐겨 구경했다.”
―어떤 지휘자가 가장 인상적이었는가.
“함께 협연했던 지휘자 중에 로린 마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의 지휘 테크닉은 단원들에게 의문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해야 단원들도, 솔리스트도 편하게 연주할 수 있다. 주세페 시노폴리는 단원들의 마음까지 지휘하는 분이다. 리허설 때 보면 단원들이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눈빛에서부터 느낄 수 있다.”
○ 수준 높은 청소년 교향악단 많이 생겨야
장 씨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신동 음악가’였다. 그 밑거름은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들려준 음악이었다.
“아침에 음악이 들리면 잠자리에서 일어날 시간이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놀 때도 동요, 클래식, 샹송 등 수많은 음악을 들으며 춤추고 놀곤 했지요. 밤에도 음악을 들으며 잠자리에 들었어요. 그게 오늘의 저를 있게 한 것 같아요.”
2002년 미국 하버드대 철학과에 입학할 때부터 국내에서 어린이 음악회를 열 계획을 세워 왔다. “성인이 되면 그동안 받았던 혜택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을 늘 듣고 자랐기 때문이다.
“요즘 어린 학생들은 학교와 학원, 공부와 숙제에 둘러싸여 있잖아요. 지적인 성장을 위해선 하루 종일 투자하지만, 정서적인 마음의 성장에는 투자를 너무 안 하는 것 같아요. 어릴 적 들은 음악은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음악은 강요가 아니라 즐거움이라는 걸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현재 전 세계에는 대니얼 하딩, 구스타보 두다멜, 미코 프랑크 등 20대의 천재적인 지휘자들이 스타로 발돋움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젊은 지휘자들이 무대에 설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천재 솔리스트는 많아도 세계적인 지휘자나 오케스트라가 나오기 힘든 이유다.
“지휘자에겐 오케스트라가 악기입니다. 나이 들어서 갑자기 좋은 지휘자가 나오는 것은 불가능해요. 말러 체임버, 베르비에 오케스트라처럼 젊은 지휘자와 함께 커 가는 수준 높은 청소년 교향악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열리는 ‘성남국제청소년관현악축제’를 통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청소년교향악단이 탄생하길 기대합니다.”
지난해 발매된 그의 쇼스타코비치 첼로 협주곡 앨범(EMI)은 유럽에서 “로스트로포비치를 뛰어넘었다”는 찬사를 들었다. 과연 지휘자로서도 스승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젊은 그의 도전은 아름답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