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일 출근 시간 서울 종로구 서린동 SK㈜ 본사 로비. 어두운 색 정장 차림 직원이 대부분인 여느 대기업과는 달리 면바지와 남방셔츠 차림의 직원이 많이 눈에 띄었다. 이 회사에서는 경쾌한 캐주얼 재킷을 입은 부장급 중간 간부들의 모습도 자주 볼 수 있다.
#2 8일 점심시간 SK㈜ 울산콤플렉스 구내식당. 지원부서의 모 부장이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마주 오던 한 직원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차렷 자세로 깍듯이 인사를 했다. 가벼운 목례와는 확연히 구분됐다.
SK㈜의 기업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장면들이다. 겉으로는 자유롭고 세련된 이미지로 보이지만 속내는 위계질서가 강하고 보수적인 모습이라는 건 SK㈜ 임직원들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5269명의 직원이 1년에 23조6515억 원(2006년)의 매출을 올린 회사.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을 강조해도 생존하기 어려운 기업 경쟁에서 이런 거대한 기업이 과연 보수적인 기업 문화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해답은 인화(人和)에 있었다. 이 회사를 지탱해 온 힘은 끈끈한 인간관계와 팀워크라는 것이 회사 안팎의 평가다.
SK㈜에 올해 1월 입사한 신입사원에게 ‘SK㈜ 입사 후 느낀 점’을 물었다. 주제를 한정하지 않은 주관식 질문의 대답에 유난히 ‘기업 문화’와 ‘인간적’이라는 단어가 많이 포함돼 있었다. 보수적인 문화는 과거 공기업 출신이라는 배경이, 그리고 팀워크를 강조하는 문화는 공장 전체가 파이프라인으로 연결돼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석유화학 사업의 특성에 기인한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팀워크만을 강조하는 집단적인 문화는 ‘21세기 글로벌 기업’에는 걸맞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SK㈜도 이런 사실을 자각하고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종종 자기주장과 개성이 강한 신입사원들이 입사 초기에 불만을 느끼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SK㈜ 홍보·기업문화실장인 김영태 전무는 “회사도 보수적이고 집단적인 문화가 조직의 활력에 해가 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1998년부터 출근 복장을 자율화했고, 업무를 벗어나 격의 없이 토의하는 회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며 “최근에는 신세대 사원을 위해 술자리 대신 공연을 함께 보는 모임도 늘고 있다”고 강조했다.
변화의 바람은 기업 문화뿐 아니라 사업 영역에도 불고 있다. SK㈜는 주유소로 유명하다. 실제로 이 회사 매출의 3분의 2가 석유사업에서 나온다. SK㈜가 지난해 정제해 판매한 석유제품은 2억4000만 배럴에 이른다.
1962년부터 시작한 석유사업이 SK㈜의 ‘간판 사업’인 것은 맞지만 ‘알짜 사업’은 따로 있다는 것이 이 회사를 아는 사람들의 설명이다. 석유 사업이 올해 1분기(1∼3월) 4조844억 원의 매출을 올린 데 비해 영업이익은 1370억 원에 그친 반면, 매출 1조5637억 원인 화학 사업은 2276억 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매출이 2490억 원인 윤활유 사업은 677억 원을 이익으로 남겼다.
SK㈜는 이 외에도 석유개발, 아스팔트, 석탄 사업을 진행하면서 OK캐쉬백, 네이트 드라이브 등 서비스 사업도 병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간질 치료제, 우울증 치료제를 개발하는 생명과학으로까지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수소연료 등 대체에너지 개발에도 열심이다.
이런 신규 사업 개발은 SK㈜의 미래와 직결된다. 현재 ‘한국의 에너지 리더’ 자리에 안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신헌철 SK㈜ 사장은 최근 “2010년에서 2015년이면 화석(化石) 에너지 소비가 줄어들 것”이라며 “그때를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SK㈜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자부심이다. 1962년 대한석유공사 창립 이후 단 한 차례도 ‘정유업계 1등’을 놓친 적이 없다는 자부심은 이 회사의 ‘DNA’로 남아 있다.
특히 석유화학 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인 250만 평의 울산 콤플렉스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자부심이 강하다. 울산 콤플렉스의 한 직원은 “SK㈜ 직원들은 울산 최초의 현대적 공장 직원이라는 긍지가 상당하다”고 말했다.
그는 “전국적으로는 삼성전자가 가장 규모가 큰 기업일지 몰라도 적어도 울산에서는 SK㈜가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과 함께 ‘빅 3’로 꼽힌다”며 “최근 회사가 1000억 원을 투자해 조성한 울산대공원을 울산시에 무상으로 기부한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직원도 많다”고 덧붙였다.
다른 직원은 “예전에는 울산에서 신랑감으로 SK㈜에 다니는 직원이 의사보다 인기가 좋았다는 말도 있다”며 웃었다.
회사도 이런 직원들의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경조금, 의료비 지원, 건강검진 등 각종 복지 혜택과 급여는 대기업 최고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이 회사의 이모 과장은 “친구들에게 급여와 복리 후생제도에 대해 이야기하면 ‘부럽다’고들 한다”고 했다.
SK㈜ 인력담당 차화엽 상무는 “대우와 복리후생 문제는 이미 충족되고 있다는 판단 아래 최근에는 직원 개개인의 글로벌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어학교육 등의 지원에 힘을 쏟고 있다”며 “이런 회사의 지원이 직원들의 자부심과도 연결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박 용 기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