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조연되어 ‘모성’으로 빛나는… 우리들의 어머니
난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주연보다 조연을 유심히 관찰하는 버릇이 있다. 얼마 전 뮤지컬 스타일로 진행된 ‘태양의 서커스 퀴담’을 보러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관객들이 원형 무대 속 주인공들에게 시선을 고정시켰겠지만 난 조그만 동작 하나에도 최선을 다하는 조연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들의 동작에는 주연들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열정과 진지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의 별’ 요청이 들어왔을 때 중견 배우 나문희 선생님이 생각났다. 그분과 동시대를 살지 않았을뿐더러 연기자도 아닌 내가 그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한다는 것이 경솔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분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분을 통해 바로 조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범하고 서민답지만 왠지 모를 흐뭇함이 담겨 있다고 해야 할까.
나문희 선생님을 처음 본 건 12년 전 KBS 일일연속극 ‘바람은 불어도’에서였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비평준화 지역인 경기도 오산에서 학교를 다녔고 수원의 명문고에 진학하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다. 입시 경쟁의 건조한 삶에서 유일한 낙은 TV 드라마 시청. 그러던 중 ‘바람은 불어도’를 보게 됐고 약간은 못된, 억척스러운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배우 나문희. 그때만 해도 그냥 이름만 아는 정도였다.
그분에게 본격적으로 관심을 쏟은 것은 내가 가수가 된 뒤였다. 우연히 이동 차량 안에서 KBS 드라마 ‘소문난 칠공주’를 봤는데 “돌리고 돌리고” 하며 나문희 선생님이 즐겁게 트로트를 부르고 계신 것이 아닌가. 거의 10년 만에 TV로 만났는데 왜 그렇게 웃음이 나오던지. 늘 바쁘기만 한 나에게 그 웃음은 안식 그 자체였다.
최근 MBC 일일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을 본 뒤부터 본격적으로 팬을 자처하게 됐다. 다소 시대에 뒤떨어진 할머니 역을 맡은 나문희 선생님은 10대들에겐 그저 ‘우스운 할머니’ 정도일지 모른다. 하지만 휴대전화기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전화기를 줄에 매달아 목에 걸고, 김치전을 젓가락 대신 손으로 찢어 자식들에게 먹이는 모습은 우리 엄마 같기도 하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유년 시절, 엄마는 늘 집에서 조끼를 입고 있었고 여러 옷을 겹겹이 껴입었다. 그때는 이해가 안 됐지만 가난하면 더 억척스러워진다고, 난방비 줄여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엄마의 심경을 이제야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시트콤 속 나문희 선생님 모습처럼…. 왜 그토록 고기 먹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는지 가난을 겪지 못하면 절대로 알지 못할 일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차 문을 열고 팬들을 만날 때면 웃어야 하는 게 연예인이다. 단 한 번의 힘든 내색도 용납이 안 된다. 한번은 엄마를 만나자마자 참았던 설움이 한꺼번에 터져 엉엉 운 적이 있다. 그런데 엄마는 내가 우는 이유를 묻지도 않고 그냥 울게 놔뒀다. 다 울고 내가 진정이 된 후에야 걱정스럽게 말을 건네셨다. 그것도 내가 힘들까 봐 일부러 밝고 친근하게. 난 그때 비로소 느꼈다. 모성애는 ‘무조건’임을. 나문희 선생님이 영화 ‘열혈남아’에서 보여 준 가슴 찡한 자식 사랑처럼 말이다.
나문희 선생님은 서민적이다.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다. 그것은 내가 지향해야 할 모습이기도 하다. 데뷔 초만 해도 내 노래가 가볍고 상업적이며 음악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배부를’ 정도로 들었다. 하지만 난 서민들 곁에서 그들이 즐길 수 있는 ‘그들의’ 음악을 하고 싶다. 마치 흰 도화지 같은 음악 말이다. 색깔이 진한 도화지는 개성이 강해 금방 눈에 띄지만 단지 그것뿐, 다른 색을 섞을 수가 없다. 어떤 색을 칠해도 발색이 되는 흰 도화지, 바로 나문희 선생님처럼 말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은, 얼마 전 길에서 처음 만난 아줌마 아저씨들이 나에게 “윤정아, 너 살 좀 쪄라”라며 마치 옆집 여동생처럼 엉덩이를 두드려 주셨다는 것.
하지만 이렇게 얘기해도 여전히 난 나문희 선생님 앞에 설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지금이야 신세대 트로트 가수가 많아졌지만 내가 데뷔할 때만 해도 나처럼 나이 어린 가수가 없었기에 2년 가까이 선배님들이 계신 대기실에는 들어가지도 못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선배님들의 ‘기’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대선배이신 나문희 선생님에게서도 무시무시한 기가 뿜어져 나올 것 같아 두렵다. 그래도 이번 기회를 통해 뵙는다면 내 디너쇼에 꼭 초대하고 싶다. 그리고 그분을 향해 무대에서 이렇게 외치고 싶다.
“‘어머니’ 하면 맨 먼저 생각나는 연기자가 당신인 것처럼 저도 ‘트로트 가수’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도 언젠간 관객들에게 선생님처럼 가슴 찡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데, 과연 그럴 수 있을지 평가해 주세요”라고. 마치 ‘태양의 서커스 퀴담’의 조연 같은 그분에게….
정리=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 나문희 “내 애창곡이 ‘어머나’예요”
“어머나, 장윤정 씨가 저를요? 저도 ‘어머나’를 즐겨 불러요.”
마음이 통했을까? 배우 나문희(66) 씨가 되레 ‘장윤정 예찬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얼마나 열심히 말하는지 그의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저도 만난 적은 없어요. TV에서 보는 모습이 전부인데 발랄하고 상큼해서 보기 좋더라고요. 고생도 많이 했는데 부모님이나 박현빈 같은 후배가수도 잘 챙겨 주는 것 같고… 주눅 들지 않고 열심히 사는 모습이 예뻐 보여요.”
세대를 아우르는 장윤정 씨의 면모는 그에게도 통했다. 나 씨는 “노래방 가면 나도 ‘어머나’나 ‘짠짜라’ 같은 신세대 트로트 곡들을 즐겨 부른다”고 말했다. 예상외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탓에 “선배님의 ‘기’가 무섭다”는 장윤정 씨의 말이 기우 같이 느껴졌다.
“호호호∼ 제가 무슨 기가 있어요. 오히려 장윤정 씨가 예의 바른 것 아닌가요? 선배를 무서워하는 걸 보니 나름대로 예의를 갖출 줄 아는 것 같네요. 보기 좋은데요.”
현재 나 씨는 MBC 일일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을 비롯해 올여름 개봉 예정인 영화 ‘권순분 납치사건’에서 주연 권순분 역을 맡는 등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특히 영화 ‘S다이어리’,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함께 출연한 후배 김선아와 새 영화 ‘걸스카우트’에 함께 캐스팅돼 7월부터 촬영에 들어간다. 장윤정 씨의 말대로 ‘대표급’ 어머니 역 배우답게 나 씨는 오늘도 어머니 역으로 카메라 앞에 선다.
나 씨가 먼저 장윤정의 디너쇼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서로 마음이 통한 걸까? “한 번도 못 갔다”는 나 씨에게 ‘장윤정 씨가 초대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하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와, 진짜요? 저야 말로 영광이죠. 장윤정 씨를 향해 내 귀를 쫑긋 세울 준비 다 해놨답니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