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목욕탕, 초창기 모습을 간직한 이발소, 동네 곳곳에서 아름다운 처마를 자랑하는 한옥들…. 반세기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온 느낌이다. 근현대사의 살아 있는 박물관, 이는 과장이 아니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 근현대사의 아픔 서린 애고개
서울 마포구 아현동은 마포나루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밤 깊은 마포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 1950년대 은방울자매가 영롱한 목소리로 부른 가요 ‘마포종점’은 바로 이곳이었다. 서울역에서도 가깝다. 이 덕분에 산업 개발이 본격화되던 1960, 70년대 전국 각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올라온 사람들이 아현동에 터를 잡았다.
호박밭만 무성하던 마을 꼭대기에 말뚝을 꽂고 천막만 치면 자기 땅이었다. 판잣집이라도 지으려 땅을 팔라치면 사람뼈가 이곳저곳에서 나와 얼굴이 파래질 정도로 놀랐다는 주민들. “어떻게든 살기 위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인골 위에 눌러앉았다”는 한 할머니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슬프고도 아련한 근현대사의 단면을 보여 준다.
아현동의 옛 이름은 애고개다. 옛날에 사람이 죽으면 서소문을 통해 시신을 만리재와 애고개, 와우산에 묻었다고 한다. 애고개는 아이들 시체를 많이 묻은 곳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갔다가 광복과 전쟁을 겪으면서 이곳에 정착한 팔순 할머니. 이제는 손님 없는 꼭대기 구멍가게를 지킨다. 이처럼 한국 현대사의 질곡이 아현동에 오롯이 들어 있다.
○ 목욕탕, 이발소, 세탁소…향수의 공간
아현동 행화탕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목욕탕으로 이름나 있다. “사람에게 목욕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몸뿐 아니라 마음도 씻어 준다는 생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목욕탕 사장님의 마음도 문화재감이다. 맘보이발소는 초창기 이발소 모습 그대로다. 이발용 의자, 이발도구, 머리 감는 곳까지 향수를 자극한다. 충북부동산 안쪽에 있는 세탁소는 ‘사장님’ 김기술(65) 씨가 이제 자기 옷만 다려 입는 ‘은밀한’ 공간이 됐지만 1967년 김 씨가 이곳에 세탁소를 차렸을 때만 해도 동네의 유일한 세탁소였다.
마을 꼭대기 한 미용실. 30년 이상 된 미용실 내부도 내부지만 ‘아줌마’들이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유쾌한 수다를 떠는 온돌이 인상적이다. 동네 사랑방인 셈이다. 아현동에서는 골목골목마다 이런 사랑방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아현시장에서 산7번지 꼭대기까지 이 구역은 일제강점기의 건축물과 현대 건축물이 공존하는 근현대 도시문화의 보고(寶庫)다. 20세기 초의 대표적 가옥 형태인 2층 한옥과 1950년대 이후 전통 한옥이 도시 한옥으로 변하면서 나타난 개량 한옥이 많다. 전통 한옥은 넓은 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 등 여러 채로 이뤄졌다.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마당이 좁아지니 한옥 한 채에 안방과 사랑방이 모두 들어갔다. 아현동 한옥은 바로 이 과정의 전형적인 모델이다.
마을 꼭대기에는 단독주택에서 공동주택으로 바뀌는 과도기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건축물이 많다. 기와집 모양의 지붕이 인상적인 행화아파트는 1970년대 초 우리 기술진이 짓기 시작한 아파트의 전형적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 옥탑방에 캠프 차려 아이들 낙서까지 기록
국립민속박물관이 올해 1월부터 도시의 삶과 문화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도시민속조사를 시작했다. 아현동 조사는 그 첫 단추다. 아현동은 일제강점기부터 21세기까지 건축물이 한데 모여 있을 뿐 아니라 산업화 시기 도시민의 전형적인 정착지여서 기록 가치가 높다. 앞으로 아현뉴타운 개발로 사라질 곳이라 이 기록은 더욱 중요하다. 조사팀은 이곳에서 주민들의 정착기, 건축물, 여성 상공인의 삶 등 아현동의 역사와 문화를 세밀하게 담고 있다.
조사팀은 아예 아현시장 근처에 옥탑방을 얻어 캠프를 차렸다. 통장단 회의, 마을의 대소사 참가는 기본이다. 주민과 함께 호흡해야 ‘진짜 기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의식주 문화도 면밀히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일정 기간 식사와 간식을 하나도 빠짐없이 적도록 했다. 심지어 아이들이 벽에 쓴 낙서까지 하나하나 기록한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아현동 보고서는 11월에 나온다. 아현동의 전형적인 가옥이나 이발소를 복원하고 마을 모습을 통째로 디지털화해 보여 줄 계획이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