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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민 칼럼]KBS 사장의 ‘반성문’

입력 | 2007-05-14 19:38:00


어떤 집에 신통치 못한 젊은이가 있다. 부모는 안중에 없고 씀씀이가 헤퍼 살림을 축내는가 하면 공부와는 담 쌓고 밤낮 컴퓨터 게임이나 한다. 그런 터에 어느 날 느닷없이 최고급 컴퓨터가 필요하니 돈 좀 내놓으라고 조른다면 그 부모 마음은 어떨까.

디지털 방송을 해야겠으니 시청료를 더 내놓으라는 한국방송(KBS)의 요구를 듣는 국민의 심정은 바로 그럴 것이다. 가뜩이나 방송 내용이 괘씸하던 차에 매달 2500원씩 강제로 뜯어 가는 수신료를 더 올려야겠다니 시청자들의 심사가 편할 리 없다. 철부지 자식 생떼 들어주기 전에 잘못된 행실부터 뉘우치게 해야 하듯 국민은 수신료를 더 내기 전에 KBS 사장의 반성문부터 받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해야 하리라.

〈반성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KBS 사장으로서 그간 저희 방송이 공영방송의 본분을 지키지 못해 왔음을 진심으로 반성하면서 수신료 인상에 대한 여러분의 심판을 받고자 합니다. 우선 제가 정권 초 여론의 비난과 KBS 임직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장에 취임했고 또 얼마 전 연임까지 한 점을 사과드립니다. 정권을 잘 보좌하라는 의도에서 저를 시킨 사람이나, 또 시킨다고 선뜻 그 자리를 맡은 제 자신이나 분명 사려가 깊지 못했던 것입니다. 당시 저만이라도 정신이 맑아 “KBS가 공정하고 격조 높은 방송을 하려면 대통령과 코드가 같은 사람보다는 좀 더 전문성을 갖춘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인물이 사장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라며 사양했어야 후세에 부끄럽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권 나팔수로 음정 높여 온 죄 반성

취임 후 저 역시 코드가 같은 사람들과 주로 어울리다 보니까 보도 내용은 ‘정권의 나팔수’의 연주가 돼 버렸고 대통령 탄핵사태 때나 행정수도 이전 논쟁 때처럼 정권이 절박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저희들은 연주곡의 음정을 높여 왔습니다. 신분은 공영방송이었지만 정신은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치 수녀복 입고 유흥 주점 도우미 노릇을 하는 것 같아 사실은 그동안 저도 괴로웠습니다.

여기에 더해 정권을 지원하려고 정부에 비판적인 정통 신문들을 때려 온 것도 미욱한 짓이었습니다. 국민이 보시기엔 그런 모습이 축구 경기에서 공격수가 슛을 할 때마다 같은 편 선수가 기를 쓰고 몸을 날려 태클 들어가는 어이없는 짓이었겠지요. 언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반언론적 행위를 해 온 것을 저는 역사 앞에 깊이 뉘우칩니다.

무엇보다 저질의 방송 내용으로 이 사회의 정신을 타락시킨 점은 저희의 가장 큰 죄였습니다. 시청률에만 신경 쓰다 보니 연일 개그맨들과 연예인들이 화면을 독점하게 해 이 나라의 우민화(愚民化)에 앞장선 것입니다. 국민의 교양을 높이고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일은 외면하고 장차 이 나라의 기둥이 될 청소년들의 정신을 퇴행시키고 정서를 황폐화시킨 것은 (비록 형법상으로는 처벌 대상이 아니라도) 국가에 큰 죄를 지은 것입니다. 어린이들에게 좋은 음식과 영양제 대신 초콜릿과 담배 같은 것을 자꾸 권해 인기를 얻고자 한 셈이지요. 그 심각한 폐해를 알면서도 민영방송들과의 시청률 경쟁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KBS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방만한 경영을 하여 국민 여러분의 호주머니를 축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데 대해서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KBS2 방송을 통해 민영방송 못지않게 많은 광고를 팔아 거둬들인 돈까지 저희는 너무 가볍게 써 버렸다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기업 같았으면 망해도 몇 번 망했을 것

방송사 내부에서조차 방만한 경영에 대한 비판이 높았지만 저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일반 기업이 그런 식으로 경영되었다면 망해도 벌써 몇 번 망했겠지만 저희는 다행히 공기업 같은 존재이기에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는 것이 쑥스럽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이 반성문을 읽으시고 제가 진정으로 회개했다고 판단하신다면 비록 경제가 어렵긴 하지만 저희가 고화질방송을 통해 공영방송의 소임을 다 할 수 있도록 수신료를 올려 대규모 시설투자에 쓸 수 있게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년필이 최고급이어야 좋은 글도 쓸 수 있고 명품 가방을 들어야 공부도 잘할 것 아니겠습니까.

이규민 大記者 kyum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