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가들이 조각상 위에서 노래하는 오페라 ‘리날도’. 사진 제공 한국오페라단
현대 오페라에서 성악가들은 무대에 그저 서서 노래만 하지 않는다. 그들은 연출 의도에 따라 뛰고, 구르고, 거꾸로 매달리고, 공중을 날아다니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성악가들이 정작 중요한 노래에는 집중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12일부터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된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는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한 역작이다. 이탈리아 출신의 연출가 피에르 루이지 피치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바로크 오페라는 주역 성악가들의 안정적 발성 속에 십자군전쟁의 스펙터클함을 보여 주는 데 성공했다.
그 비결은 성악가들이 움직이는 거대한 말 조각상이나 배, 동상의 기단 위에 앉거나 서서 노래를 하는 것이다. 성악가들은 가만히 서 있었지만 검은 옷을 입은 연기자들이 3시간 동안 쉴 새 없이 바퀴 달린 말과 배, 거대한 암벽동굴 등을 밀고 다니며 역동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특히 주인공들의 등 뒤에서 끊임없이 펄럭이는 10∼15m 길이의 붉은색과 흰색 망토는 그 효과를 더했다.
피치의 연출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주역들을 돋보이게 해 준 연기자 23명의 힘이었다. 그들은 3시간 동안 바닥을 기어 다니며 수레를 끌었고 망토를 펄럭였다. 성악가를 태운 3.2m 높이의 말 조각상을 음악에 맞춰, 고정된 핀 조명이 있는 곳까지 동선을 따라 정확히 움직인다는 것은 가히 신기에 가까운 일. 특히 십자군 영웅들이 칼싸움을 하는 마지막 대회전은 자칫 조그만 실수라도 있으면 성악가들의 큰 부상마저 염려되는 상황이었다.
피치는 커튼 콜 때 연기자들을 가장 먼저 무대에 올려 껴안으며 기뻐했다. 출연 성악가들은 모두 이탈리아 밀라노 스칼라 오페라극장에서 왔지만, 얼굴을 드러낸 연기자들은 모두 한국인이어서 놀라움을 자아냈다. 그들은 “바로크 오페라라고 해서 갑옷 입고 멋지게 나오는 줄 알았다”던 젊은이들이었다. 무릎이 다 까지고, 신발이 찢어지는 힘든 연습으로 중간에 그만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오페라에 처음 참여한 젊은이들을 불과 일주일 만에 멋진 움직임을 창조하는 주인공으로 조련해 낸 피치의 리더십은 ‘거장’이란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실감하게 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