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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20년 가톨릭 잔 다르크 시성

입력 | 2007-05-16 03:00:00


1920년 5월 16일 가톨릭교회가 잔 다르크(1412∼1431)를 시성(諡聖)했다. 화형당한 지 489년 만에, 마녀 혐의가 풀리고 명예 회복된 지 464년 만이었다. 뛰어난 인문학자였던 토머스 모어의 시성도 400여 년이 걸릴 만큼 가톨릭 성인의 반열에 오르기란 오랜 시간과 복잡한 절차가 필요한 일이었다.

고결한 신앙심뿐 아니라 드라마틱한 삶 때문에 잔 다르크는 종종 문학과 회화, 영화의 주인공이 됐다. 잔 다르크가 신의 계시를 들은 것은 열두 살 때다. 대천사들이 프랑스를 침략한 영국군을 몰아내고 왕세자 샤를(후에 샤를 7세가 된다)을 왕위로 올리는 임무를 자신에게 맡겼다는 것. 당시 프랑스와 영국은 길고 긴 백년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뜨거운 열정으로 왕세자를 감동시킨 잔 다르크는 1429년 4월 29일 오를레앙 요새에서 첫 전투에 나선다. 오를레앙 백작은 계시를 받았다는 소녀를 믿을 수 없어 작전회의에 들어오지도, 전투에 참가하지도 못하게 했지만 신념으로 가득 찬 잔 다르크는 깃발을 들고 최전선에 뛰어든다. 이날 프랑스 군대는 오를레앙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영국군에게 붙잡힌 뒤 법정에 섰을 때 잔 다르크는 칼과 창을 들긴 했지만 직접 무기를 사용하기보다 깃발을 들고 독려하는 역할을 주로 했다고 증언했다. 순전히 병사의 사기를 북돋았던 것인지, 실제로 뛰어난 군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렇지만 잔 다르크가 프랑스의 불리한 전세를 뒤집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잇단 승리에 잔 다르크의 인기는 크게 치솟았다. 잔 다르크가 영국군의 포로로 잡혔을 때 샤를 7세가 방관했던 것은 압도적인 인기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잔 다르크는 이단 혐의로 재판에 회부됐고 홀로 자신을 변호해야 했다. 영국 측은 70명에 이르는 법률 자문관을 구성했지만 잔 다르크에겐 자신을 도울 증인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잔 다르크의 변론은 놀랍도록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었다. 심판관들은 읽기와 쓰기도 못하는 소녀의 유창한 말솜씨에 수차례 말문이 막혔다.

오랜 재판 끝에 지칠 대로 지친 잔 다르크는 교회의 처분을 따르겠다는 문서에 서명한다. 그는 문맹이어서 자신이 어떤 문서에 서명하는지도 몰랐다. 1431년 5월 30일 잔 다르크는 화형에 처해졌다. 1867년 잔 다르크의 갈비뼈로 알려진 유골이 발견돼 프랑스 시농의 한 박물관에 보관됐지만 최근 조사에서 유골이 가짜라는 결과가 나왔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