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미술관 밖으로 나선다. 하늘의 푸른빛이 훨씬 더 짙어졌다. 그야말로 짙은 쪽물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하다. 하늘을 넉넉히 품은 운하의 물빛도 하늘만큼 깊다. 아, 더 이상 태양의 유혹을 외면할 수 없다. 내 그들의 유혹을 기꺼이 받아들이리라.》
‘문화’, ‘낭만’, ‘유럽’, ‘기행’, ‘미술’ 모두 우리 시대의 코드와 직결되는 단어이다. 다소 나른하면서도 부르주아적인 이런 단어들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온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에 들어 이른바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가 내려졌으니 이제 우리도 20년이라는, 어쩌면 짧고 어쩌면 그럭저럭 논할 만한 연륜을 갖게 된 셈이다.
오늘도 인천국제공항은 숱한 여행객으로 북새통이지만 과연 이들이 여행지의 박제된 표피와 진열장 안에 정리된 유물의 ‘구경’을 넘어선 해석과 논리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관점을 가질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쉽게 떠나기 힘든 게 장거리 해외여행이니 남들도 알고 자신도 아는 것을 ‘단체’로 보고 오는 차원을 넘어서려면 약간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여행다운 여행을 위해서라면 약간의 투자와 공부는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미술사 전공자답게 저자의 주된 관심은 방문한 도시들의 시각예술, 특히 그림이다. 저자는 시각예술이 사회와 문화, 정치의 유기적이고도 복합적인 산물이라는 사실을 차분하고도 예민한 글쓰기를 통해 잘 보여 준다. 한마디로 이 책은 시각예술의 인문학적 맥 짚기라 할 수 있는데, 특히 도시마다 중심 테마를 선정하여 완결된 하나의 스토리를 갖게 한 것은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저자가 둘러본 피렌체 톨레도 암스테르담 파리 런던 베네치아는 모두 유명 미술관이 있는 도시로서 각 도시의 특징은 기존 관념과 연결되기도 하고 특유의 삐딱한(?) 시선으로 인해 낯설어 보이기도 한다. 저자의 독특한 관점은 본문에서도 언급한 “우리에게 낯익은 대상이 그것과는 상관없는 장소에 놓여졌을 때 느끼는 이른바 ‘데페이즈망(d´epaysement·전치·轉置)’에 의한 당혹감과 신선함”을 만끽하게 해 주는 반가운 체험이다.
피렌체에서 사보나롤라의 죽음을 목도하고, 톨레도에서는 묵시록의 장면과 맞닥뜨리기도 하며, 파리에서 모디아노의 소설 속 고독한 소녀를, 베네치아에서는 비스콘티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떠올리지만 여정의 곳곳에서 경박한 일본인 쇼핑부대를 만나기도 하고 아름다운 화장실을 함께 이용하게도 해 준다. 이런 유의 책에서 곧잘 보이는 미술사 지식의 과시가 아닌 적절하고도 수준 높은 해설은 감탄스럽다.
도시와 미술, 그림과 영화, 곤돌라와 바포레토(수상버스), 포케몬과 홍등가, 르네상스와 무데하르 양식(스페인적 요소와 아랍적 요소가 결합된 예술), 기타 팝송과 오페라, 케밥과 인도네시아 요리까지 고루 잘 버무려진 성찬을 맛보았지만 역설적인 갈증은 더욱 커진다. 비틀스의 도시 리버풀, 러시아의 영광 상트페테르부르크, 동서양의 가교 이스탄불, 고대 그리스의 진주 아테네, 비겔란의 도시 오슬로 등등을 친절히 읽어 주면 기꺼이 와유(臥遊)할 것만 같다. 이건 욕심인가.
김상엽 인천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미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