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의 팔당호반에 자리잡은 닥터 박 갤러리 앞에 선 폭스바겐의 고급 럭셔리 세단 페이톤. 투명유리공장의 클래식음악이 흐르는 조립라인에서 전과정 수공으로 생산된다. 조성하 기자
경기 양평의 남한강변에 자리잡은 닥터박갤러리의 야외테라스인 ‘창조의 길’. 강안의 물과 산, 집이 어울린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멋진 곳이다. 양평=조성하 기자
폴크스바겐 페이톤 타고 양평호반 갤러리 나들이
페이톤(Phaeton). 폴크스바겐이 내놓은 새로운 개념의 고급 세단. 솔직히 말해 이런 럭셔리 세단은 사륜구동으로 온 사방을 휘젓고 다니는 동번서번(‘동에 번쩍 서에 번쩍’을 줄여 만든 내 아이디)식의 내 취향은 아니다. 게다가 월급쟁이의 경제력으로는 그저 꿈만 꾸는 또 다른 ‘드림 카’인지라 관심조차 두지 않는 차다. 단, 이 한 가지만은 관심거리다. ‘폴크스바겐이 만든 엄청 큰 덩치의 비싼 차’라는 의외성이 그것.
내가 차를 체험하는 방식은 좀 독특하다. 어떤 차든 처음 운전석에 앉으면 시동에 앞서 차와 대화를 시도한다. 도대체 이 차가 내게 보여주려는 게 뭘까. 차의 성격, 그리고 메이커가 전하고픈 메시지를 찾는다. 차라는 게 그저 잘 달리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몰라도 차를 나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여긴다면 내 말에 동의할 것이다.
비틀과 뉴비틀, 골프로 이어진 중소형의 라인업만 해도 괜찮았다. 적어도 ‘인지적 혼란’은 야기시키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럭셔리 유틸리티 차량(LUV) 투아렉과 V6, V8 페이톤의 등장은 ‘사건’이었다. 작은 원 안의 W자에 V자를 포갠 ‘국민차’ 폴크스바겐의 엠블럼에 이 거구의 호사극치형 세단을 담아 낼 심리적 공간이 부족한 탓이다.
페이톤의 출생부터 살펴보자. 메시지가 좀 더 분명해진다. 드레스덴. 페이톤과 투아렉은 여기, 독일의 작센왕국에서 태어났다. 1996년 나는 드레스덴의 엘베 강을 수차식 증기선으로 여행 중이었다. ‘독일의 피렌체’라 불리는 이곳. 도시의 수많은 바로크 건축물 덕분에 얻은 별명이다. ‘동독 치하에서 선 저 꼴사나운 콘크리트 빌딩만 없다면….’ 바로크 돔의 연속선이 하늘에 빚어낸 우아한 스카이라인을 감상하던 중에 느낀 아쉬움이다.
그렇다. 페이톤의 첫 번째 메시지. 그것은 드레스덴의 우아함이다. 페이톤의 제 모습을 느껴볼 요량으로 시동버튼을 눌렀다. 페이톤의 ‘연주’가 시작됐다. 첼로의 C음(가장 낮은 음의 현)쯤 될까. 낮고 풍부한 베이스음역의 부드러운 엔진음. 들린다기보다는 느껴진다. 소리가 아니라 차체의 진동으로.
폴크스바겐이 페이톤의 베이스로 드레스덴을 택한 이유. 매우 독일인답다. 철학적이라는 이야기다. 표현주의와 철학이 왜 독일인의 한 모습으로 각인됐는지를 이해하려면 그 열쇠는 드레스덴 역사에 숨겨져 있다. 18세기 초. 아우구스투스(1697∼1733) 왕이 연 작센왕국의 최전성기다. 드레스덴의 화려한 건축은 그 결과다. 앞 다퉈 몰려온 이탈리아 건축가의 손으로 르네상스의 영화는 재연됐다. 로코코, 바로크 등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로.
이 모든 것이 파괴된다. 1945년 2월 13일 시작된 연합군의 드레스덴 대공습이었다. ‘융단폭격’이란 말을 탄생시킨 이날의 참상. 히로시마 원폭투하에 비견될 정도다. 지금의 드레스덴이 대공습에서 겨우 건진 초라한 모습에 불과하다면, 글쎄. 아우구스투스의 드레스덴은 어땠을까. 상상하기조차 버겁다.
이게 끝이었다면 폴크스바겐의 드레스덴은 없다. 페이톤 역시. 드레스덴의 메시지는 파괴를 극복한 열정, 새 시대를 향한 제안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기념비적 사건이 있었다. 2005년 10월 29일, 전후 60년 만에 갖는 최고의 경삿날. 도시의 랜드마크인 프라우엔 대성당의 준공식이다. 공습으로 반파돼 동독 치하에서 버려진 이 건물. 통일 후 원상회복 운동이 펼쳐졌다. 다시 짓는 통상의 방법 대신 잔해를 죄다 모아 퍼즐처럼 끼워 맞추는 드레스덴만의 방식으로.
1996년 당시 엘베 강변은 이런 퍼즐 조각의 보관소였다. 잔해를 건축물의 부분별로 분류해 번호까지 붙였다. 공사비를 마련한 사연도 애달프다. 참화를 기억하는 이들의 주머니가 그 출처다. 그 후 10년. 성당은 제 모습을 되찾았고 돔 꼭대기에는 사라진 황금십자가가 다시 섰다. 용서와 사랑을 의미하는 십자가. 설계자는 영국인, 공습을 감행했던 영국군 조종사의 아들이다.
창조와 파괴, 열정의 현장 드레스덴. 그 도시가 주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새 시대를 향한 새로운 제안. 폴크스바겐이 페이톤에 담고자 했던 것도 역시 같다. 미래를 향한 제안-사람과 환경을 위한 자동차. 그것을 담은 것이 차뿐일까. 그들은 제작과정에도 담았다. 드레스덴의 폴크스바겐 공장은 그 자체가 메시지다.
통유리로 내부를 훤히 들여다보이게 지은 투명유리공장. 원목 마루의 조립라인에서는 기계소음 대신 클래식음악이 흐른다. 사람이 더는 기계의 보조가 아니다. 자동화는 폐기됐고 대신 장인의 손길이 차를 빚는다. 부품 공급도 친환경적이다. 드레스덴의 전찻길로 수송하니까.
고객도 생산과정에 참여한다. 원하는 색상과 재질로 내 차의 실내를 꾸민다. 나무가 장식된 정원에 둘러싸인 공장은 그 자체가 하나의 갤러리. 고객을 위한 배려다. 유리창을 통해 내 차의 조립과정을 관람한다. 그리고 한 공간에서는 명품브랜드의 패션쇼와 오페라 공연이 정기적으로 열린다. 차량 인수를 위해 공장을 찾아보라. 특별한 이벤트가 VIP라운지에서 펼쳐진다. 평생 잊지 못할, 아주 특별한 이벤트가.
이런저런 상념에 젖는 동안 차는 벌써 경기 양평군의 남한강변을 달리고 있었다. 페이톤으로 양평을 찾은 이유. 엘베 강의 드레스덴 이미지 때문이리라. 목적지는 분명했다. 강변 물가의 ‘닥터박갤러리’다. 드레스덴을 감상하기에는 엘베 강이 제격. 그러나 양평은 물 위에서 감상할 수 없다. 상수원보호지역인 탓. 그런 양평에서 물을 볼 수 있는 대안은 오직 하나, 물가의 집이다. 그러기에 이 갤러리만큼 좋은 곳을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닥터 박은 박내과(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박호길 원장을 이른다. 평생 미술품 수집에 힘을 쏟은 컬렉터에게 미술관은 꼭 실현시키고픈 꿈이었다. 결국 그는 해 냈다. 물가 비탈의 좁고 긴 땅에 태어난 이 공간. 갤러리가 아니었다면 러브호텔이 들어섰을 땅이 ‘지혜의 건축’을 말해 온 건축가 승효상 씨의 열정으로 엘베 강의 드레스덴처럼 아름답게 태어났다.
옥상의 ‘하늘정원’, 물가의 테라스 ‘창조의 길’, ‘쉴만한 물가’(카페) 곁에서 만나는 남한강 물. 같은 한강이지만 그 물은 갤러리의 공간에 따라 저마다 새롭게 태어난다. 햇빛 찬란한 5월 어느 날 오후. 야외방주극장 옆 테라스에 앉아 차를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그리고 그 뒤, 갤러리 현관에 선 페이톤의 모습이 돋보인다. 양평호반에서 피어난 드레스덴의 메시지. 좋은 메시지를 담은 차가 진짜 좋은 차라는 사실을 페이톤은 침묵으로 말해 준다. 좋은 날 좋은 차로 멋진 곳에서 드라이브를 즐긴 나는 그래서 더 즐겁다.
▼ 여행정보▼
◇찾아가기=올림픽대로∼미사리∼팔당대교∼국도6호선∼양근대교∼우회전(지방도88호선)∼힐하우스∼닥터 박 갤러리.
◇이용안내
▽주소=경기 양평군 강하면 전수리 19-1, www.drparkart.com
▽전화=031-775-5600
▽관람시간=오전 11시∼오후 8시. 월요일 쉼. 작품전과 더불어 팔당호 한강의 모습도 관람할 수 있다.
▽입장료=6000원. 에스프레소 등 차 한 잔이 무료로 제공된다.
▽시설=1층에 카페(스낵), 2층과 3층에 전시실과 아트 소품점. 현재 ‘개성&열정’전(27일까지) 전시. 가족행사(회갑연) 등이 가능한 실내외 공간이 있다.
양평=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