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크는 나무가 없듯이 바둑의 착점도 홀로 빛나는 수는 없다. 인간사처럼 돌과 돌이 서로 얽히고설켜 제 가치를 낸다. ‘살아있는 기성’으로 추앙받는 우칭위안 9단은 일찍이 “바둑은 조화”라고 갈파했다. 종착역에 다다랐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그리 울었듯 승리는 선착점의 가치를 최대한 살린 쪽에 돌아갈 것이다.
백 162로 움직였다. 사느냐 잡히느냐. 누가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백 168까지는 내다본 길이다. 이때 떨어진 흑 169, 171의 연타. 이건 수읽기 회로에 없던 수다. 황진형 아마 5단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진다. 삼수갑산에 가더라도 백 172로 버틸 수밖에 없는데 흑 173, 175가 두 눈 뜨고 보기 민망하다. 선착점 흑 ○의 가치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흑 181로 백 ○ 석 점이 꼼짝없이 떨어졌고 흑 183으로 백 ○마저 고스란히 잡혔다.
백의 착각이었다. 나중에 이 판을 검토한 이재웅 5단은 “백 162로 참고도 1로 두고 흑 2에 백 3으로 잡았더라면 흑 8까지 서로 어려운 바둑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망연자실한 황진형 아마 5단은 이후 몇 수를 더 두다가 흑 197을 보자 돌을 거두었다.
해설=김승준 9단·글=정용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