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봄 어느 날, 무역회사를 경영하던 40대 초반의 한 사내가 충남 연기군의 운주산에 올랐다. 집안일로 볼일이 있어 근처에 올 때마다 자주 찾는 산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기분이 좀 달랐다. 무언가 삶의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운주산 정상에서 석비(石碑) 하나를 발견했다. 비문을 보니 ‘백제 부흥 운동의 근거지였던 주류성(周留城)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지만 그 정확한 역사를 알 길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비문을 보는 순간 머리를 스친 생각. “이거구나. 가까운 곳에 할 일을 놔두고 그동안 방황을 하며 먼 길을 돌아오다니….”
믿기 어렵지만, 한 사내의 운명은 그렇게 바뀌었다. 그는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출판사를 차렸다. 출판을 통해 백제 부흥의 역사, 주류성의 실체를 밝혀 보겠다는 야심에서였다.
그리고 15년이 흘렀다. 그동안 백제 책을 40여 종 출간했다. 책만 낸 게 아니다. 전자공학과 출신인 그였지만 고고학자들과 어울리면서 백제 유적 발굴 현장을 쫓아다녔고 대학원에 진학해 ‘백제 부흥 운동’을 주제로 박사 논문까지 썼다.
백제에 푹 빠진 이 사내는 주류성 출판사의 최병식(56) 대표. 한국학 미술 환경생태 과학 바둑 등 어느 한 분야의 책을 전문으로 내는 출판사가 적지 않지만 최 대표의 주류성은 그야말로 ‘전문 중의 전문’이다. 국내의 백제사 연구 성과는 그의 출판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한 우물만 깊게 파고 들어가는 그 고집이 부러워 “참 멋집니다”라고 말을 건네자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백제 책을 수십 종 냈지만 딱 한 종이 3000권 이상 팔렸고, 모두 1쇄에 그쳤습니다. 그래서 요즘엔 정말 외롭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리곤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외도를 고백했다.
“신라 책 2종, 고구려 책 2종, 발해 책 1종, 문화재 신문도 내봤습니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좀 더 많이 팔아 보려고….”
신라 책, 발해 책으로 돈을 벌려고 했다니, 남들이 보면 그 모든 것이 전문 분야에 속하는 것인데 그걸 외도로까지 생각하다니. 최 대표는 어지간히 백제를 좋아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요즘은 통섭의 시대다. 이질적인 분야가 서로 만나야 새로운 무엇이 나온다고 말하는 시대다. 우물을 깊게 파려면 넓게 파야 한다고 강조하는 시대다. 맞는 말이다. 최근 출판사들이 통섭을 시도한 책을 기획하고, 자회사를 만들어 다양한 장르의 책을 내는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여전히 깊은 우물이 필요한 분야가 있다. 사료가 매우 취약한 백제사는 특히 그렇다. 학계도 하지 못한 일을 주류성이 하고 있다. 역사학계는 그래서 주류성을 주목하고 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