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병사-어느 독일 병사의 2차 대전 회고록/기 사예르 지음·서정태 옮김/735쪽·2만4900원·루비박스
6·25전쟁 당시 지리산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 총경은 토벌 도중 이런 말을 남겼다.
“저들이 과연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얼마나 이해하고 있겠는가.”
죽고 죽이는 현장으로 내몰린 병사들은 자신들이 과연 무엇을 위해 싸웠다는 것을 얼마나 이해한 채 죽어갔을까.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러시아를 무대로 한 전쟁 회고담이다. 저자 기 사예르는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군 보병사단에서 전투에 참가한 병사였다.
독일인 어머니와 프랑스인 아버지 아래 태어난 저자는 출생지도 독일과 프랑스의 영토를 여러 번 왔다 갔다 했던 알자스 출신이다. 모호한 정체성으로 차별을 당할 때도 있지만 그는 언젠가 프랑스와 독일이 한편이 되어 유럽에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꿈을 안고 전쟁에 임한다.
그러나 희망을 안고 도착한 동부전선에선 나폴레옹도 뒷걸음치게 만든 혹독한 추위, 배고픔, 질병과의 사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일개 사병인 저자의 눈에 투영된 전쟁터는 인간이 만든 아수라장이다.
총알과 포탄이 날아다니며 들려오는 비명소리, 사방으로 튀는 피와 살점들, 탱크에 짓이겨져 피투성이가 된 동료들의 시체,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 추위를 막기 위해 전사자의 시체로 쌓은 벽, 겹겹이 이어지는 포위와 보급로의 단절로 인한 기아와 동상의 만연, 그리고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살육당하는 민간인들….
저자는 전쟁을 일으킨 히틀러를 비판하거나 적군인 소련군을 증오하지 않는다. 다만 어떻게 하면 이 끔찍한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를 생각할 뿐이다. “히틀러나 국가사회주의 또는 제3제국을 위해 싸우지 않았다. 심지어 가족들을 위해 싸우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단순히 두려움 때문에 힘을 내 싸웠다.”
전쟁에 패배해 연합군의 포로로 잡힌 그에게 프랑스 장교는 말한다. “집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최대한 빨리 이 일들을 잊어라.” 그러나 그는 수십 년이 지나 이렇게 회고한다. “전쟁은 일생 동안 사람에게 상처를 남긴다. 여자친구, 돈, 행복해지는 법을 잊을 수는 있어도 모든 것을 망쳐버린 전쟁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