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배리 씨가 그린 달마도.
《한 뼘, 한 치를 더 차지하기 위해 세상을 향해 바득바득 대들며 살아가던 시절이 있었다.
싸워 이기는 것이 세상 이치인 줄 알던 시절이다.
그런 젊은 날에 세상을 빙 돌아가는 법을 알려주는 이가 있었다.
아니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다.
브라이언 배리.
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참으로 다양하다.
탱화 전문가, 카피라이터, 홍보 전문가, 번역가….
하지만 그는 자신을 다 떨어진 양코배기라고 능청을 떤다.
“이름이 뭐요?” 하고 물으면 “부안 부 씨, 브라이언 배리”라고 전라도 사투리로 대답한다.
그래서 어느 때부터인가 주변 친구들이 그를 ‘부 형’이라 부른다.》
○ 태국 왕립 사원에 한국 탱화 남긴 벽안의 한국인
1982년 겨울, 대우에 입사해 내가 부 형을 처음 만났을 때 그의 한 손에는 꽹과리 채가, 또 다른 손에는 옥편이 들려 있었다.
“성님 그거 뭐요?” “응, 깽매기(꽹과리의 전라도 사투리) 채여. 이렇게 겁나게 두들기면 얼마나 신나는지 몰러. 동상도 함 해 봐.” 어느 날 사물놀이 공연을 보다 절로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바람에 농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예 김병섭 우도굿패에 들어가 공연을 다녔다.
“옥편은 또 뭐요?” “그러니까 시방 불교 공부를 쪼께 할라니까 한자를 알아야 쓰것더라고.” 사무실에서도 복도에서도 지하철에서도 심심하면 옥편을 깽매기 채로 두들겼다. 엉덩이를 들썩거리면서. 된장 먹고 자란 나는 재즈 공연을 찾아다니는데 말이다.
몇 년 후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있는 그의 집에 갔다. 손바닥만 한 골방에 엎드려 붓으로 뭔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뭐하는 것이여, 성님?” “응, 긍께 시왕초(十王草)를 3000장 그려야 혀.”
봉원사에 갔다가 탱화를 보는 순간 몸뚱이가 꽁꽁 얼어붙더란다. 그 길로 만봉 스님을 찾아가 탱화를 배우겠다고 했으니 만봉 스님 기가 막혔겠다(만봉 스님은 현대 불화에 큰 족적을 남긴 인간문화재 단청장. 지난해 입적했다). 노랑머리 파란 눈의 사내가 와서 탱화를 배우겠다 하니. “3000장을 언제 다 그려, 성님?” “하루에 한 장씩 그리면 10년쯤 걸리고 10장씩 그리면 1년쯤 걸리겠지.” “그럼 하루에 몇 장 그리는데요?” “첨이라 하루에 두 장도 못 그려. 근디 그게 무슨 상관이간디. 차나 한 잔 혀.” 김치를 먹고 자란 나는 앤디 워홀에게 열광하고 장 미셸 바스키아를 흠모하고 있는데 말이다.
몇 년 전 부 형의 얼굴이 CNN을 통해 세계에 알려졌다. 태국 왕립 사원의 단청을 그리고 난 후의 일이다. 태국 불교사를 통틀어 벽안의 외국인이 태국 전통 사찰의 탱화를 그린 적이 없다 하니 보통 일은 아닌 것이다. 우연히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보게 되었는데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저 영어 사이로 간간이 ‘거시기’ 소리만 들렸다.
“아니 성님 어쩐 일이야, 매스컴 타는 것을 그리 싫어하더니 한 방에 전 세계에 얼굴을 알렸어요. 그런데 영어로 인터뷰를 하는데 웬 거시기 소리를 그리 많이 했어요?” “아이고 그러게 말이여, 자꾸 거시기 거시기 그 소리가 나와 부러서 혼났구먼. 미국에 계신 성님도 보셨는데 사찰 이름이 거시기인 줄 알았다대.” 아마 거시기라는 전라도 사투리가 CNN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진 최초의 일일 것이다.
○ 우리 땅 우리 문화 되돌아보게 만든 부 형
나는 1990년 인도 여행을 다녀온 후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녀 봐도 병명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종합병원도 한약방도 별 효과를 보지 못하자 전국의 도사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우연히 의사 친구의 도움으로 베체트라는 난치병 진단을 받았다. 앞만 보며 미친 듯 달려온 내게, 이제 사회에서 전문가로 인정도 받고, 이름 석 자 여기저기 알려지기 시작한 내게, 그것은 칠흑 같은 절망이었다.
“동상! 좀 쉬어, 전라도 내 고향에 가면 개암사란 절이 있응게 거 가 몇 달 쉬어, 그럼 다 나서. 근디 거기 부안이 내 고향이잔녀. 거기 지지포(변산면 지서리의 옛 이름)에 가면 사랑방 다방이 우리 성님이 하는 데여, 내가 돈 줄텡께 과일 실한 놈으로 사서 전해 주면 고맙겠구먼. 안부도 전해주고….”
울 할머니 서낭당에 빌고 빌어, 엉덩이에 몽고반점 생생하게 태어난 나는, 내 땅의 절집을 찾아가는 데 미국 사람의 소개를 받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다. 브라이언 성님 덕에 한겨울 산사와의 인연은 다시 건강을 회복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어쩌면 부 형과의 인연 덕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른다. 아니, 단지 육체의 건강뿐만 아니라 무작정 서구로 향해 있던 시각과 앞으로 내달릴 줄밖에 몰랐던 내게, 빙 돌아가도 된다고, 내 땅을 제대로 보고, 나누고 비우는 마음까지 되찾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이 땅 세심천변에 관심을 갖고 우리 문화에 반하게 된 것도, 그래서 ‘곱게 늙은 절’이란 책을 쓰게 된 것도 다 부 형 덕분이다.
부 형은 스물네 살 때 평화봉사단으로 전라도 부안에 왔다. 2년여를 머물고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왔다. 당시 친아들처럼 대해 주던 하숙집 아주머니를 지금은 수양어머니로 모시면서 이 땅에서 태어난 사람보다 더 잘 익은 된장처럼 살고 있다.
그런 그는 늘 겸손하다. 평생을 비우고 나누는 느릿느릿한 삶을 살고 있다. 열심히 벌어 어려운 이들을 위해 쓰고, 몇날 며칠 밤새워 그린 달마도나 탱화를 국내외 사찰에 기증하고. 성철 스님 법어집을 영역하는 것에 행복해하고. 오늘도 40년 가까이 빙 둘러 가는 길을 바랑 하나 둘러메고 웃으며 가고 있다.
“성님은 이 땅이 뭐가 좋아서 다시 돌아왔어?”
“아이고 그놈의 홍어 냄새와 깽매기 소리가 자꾸 꼬드기잔녀.”
어느 날부터 브라이언 배리 형님의 구수한 사투리가 내 정수리에서 별빛처럼 반짝거린다.
심인보 디자이너·더 브랜드 나인 대표
■ “스님이 되든 안되든 다른 게 없당께”
서울시와 삼성을 비롯해 수많은 기관과 기업의 로고를 디자인했다. 심인보(50·사진) ‘더 브랜드 나인’ 대표는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끗발 센’ 기업이미지(CI) 디자이너였다.
최고라는 생각에 무서울 것 없었던 절정기에 심 대표는 앓기 시작했다. 그러고 얼마 후 판정받은 베체트병은 면역 시스템이 자기 몸을 공격하는 무서운 면역계 질환이었다. 세상에 대한 미움만 가득했던 그때, 심 대표는 전북 부안의 개암사를 떠올렸다. ‘부 형’ 브라이언 배리(62) 씨가 가보라고 했던 그곳엔 주지 스님과 고시생, 목수 일을 그만둔 소설가 지망생이 있었다. “한번은 스님이 제가 제일 부자니 삼겹살과 술을 사오라고 했어요. 사오기는 했지만 술김에 ‘스님이 웬 고기며 술이냐’고 대들었죠.” 스님이 호통 쳤다. “예끼, 네놈 눈엔 죽은 고기는 살았고 산 풀은 죽었느냐?”
저 멀리 서양 최고 디자인만 찾았고 껍질뿐인 명성을 좇았다. 고기만 생명이고 풀은 생명이란 생각을 못한 것처럼 서양 것만 좋고 한국 것은 뒤진다는 편견 속에 살아온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부 형이 새삼 존경스러워졌다.
“부 형은 기독교 세계관의 테두리를 뛰쳐나와 한국의 가치를 깨달았어요.”
‘부 형’은 우리가 ‘아메리칸 스타일’을 동경할 때 사물놀이와 불화를 배웠다. 성철 스님의 법문집 ‘이 뭐꼬’를 영역한 불교 화가. 환갑이 지난 지금도 어려운 이웃을 돌보며 자비를 실천한다. 외국에 나가 양식을 먹으면 속이 느끼하다는 그는 영락없는 한국 사람이다. 1945년에 태어난 자신을 ‘해방둥이’라고 부른다. 심 대표에게 한국의 소중함을 말 아닌 몸으로 보여준 인생 스승이다.
부 형은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다. 심 대표는 “자신을 낮추는 게 몸에 배 알려지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다행히 글을 허락한 것은 두 사람의 깊은 신뢰를 보여주는 일이리라. 부 형의 육성은 심 대표의 전언으로 대신한다.
어느 날 심 대표가 물었다. “형님, 그렇게 불교가 좋으면 머리 깎고 스님이 돼야죠?” “동상, 시계방 시계들 봤어? 분침 초침이 어떤 놈은 느리고 어떤 놈은 빠르고, 다 달라. 스님이 되든 안 되든 달라질 게 없당께.”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