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상여의 사방에 매달린 색실 매듭 유소(流蘇)와 위 난간에 드리운 수실들이, 망인의 혼백이 흔드는 마지막 손처럼 나부낀다.(중략) 곡성과 상여 소리가 서러운 물살을 이루어 마당에 차오르고, 휘황한 비단 공단 만장(輓章)들은 바람에 물결처럼 나부끼는데, 상여는 그 물마루에 높이 뜬 채로 저승의 강물 저 먼 곳으로 떠나고 있었다. 마지막 가는 길이어서 이다지도 곱게 치장을 하고 가는 것일까.’
많고 많은 우리 문학작품 중에 상여행렬조차도 이토록 아름답게 묘사한 글이 또 있을까. 최명희(1947∼1998)의 ‘혼불’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소설가 최일남 씨가 ‘혼불’에 대해 “미싱으로 박은 이야기가 아니라 수바늘로 한 땀 한 땀 뜬 이바구”라고 한 이유를 알 만하다. 문학평론가 유종호 씨는 “우리 겨레의 풀뿌리 숨결과 삶의 결을 드러내는 풍속사이기도 한 이 소설은 소리 내어 읽으면 판소리 가락이 된다”고도 했다.
하지만 내게 최명희란 이름은 1977년 어느 겨울날, 눈발이 흩날리던 교정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가게 한다. 세상만사가 마뜩하지 않던 이 사춘기 여중생의 국어 선생님이 최명희였다. 긴 단발머리와 단정한 스커트 차림의 선생님은 다정다감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어쩌다 복도에서 마주쳐도 인사도 잘 안 받아 줄 정도였다. 천방지축 찧고 까부는 우리를 늘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곤 했다.
하지만 수업시간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우리들은 국어시간이면 순번을 정해 수업 시작 전에 시(詩) 한 편을 칠판 가득 써 놓아야 했다. 릴케건 이육사건 어떤 시인의 시도 좋았다. 선생님은 10분 정도 운율에 맞춰 시를 낭송하게 한 후 시의 배경과 특징 등을 설명해 주었다. 서정주나 윤동주의 시가 적힌 날은 시로 시작해 시로 수업이 끝날 때도 있었다. 눈이라도 내리면 교과서는 덮어 버리고 최백호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를 부르거나, 시를 외우도록 했다.
우리는 또 ‘연상수첩’이란 작은 노트를 한 권씩 마련해야 했다. 선생님은 시 낭송이 끝나면 연상수첩을 펴게 한 후 매일같이 그날의 ‘단어’를 불러 주었다. 우리는 연상수첩에다 그 단어로부터 연상되는 단어들을 써 내려갔다. 연상 작업이 끝나면 선생님은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이 연상한 단어들을 읽게 했다. 우리는 ‘봄’이라는 단어가 20회쯤 연상을 거듭해 어떤 아이에게는 ‘죽음’이 되고 다른 아이에겐 ‘사랑’이 되는 언어의 마술을 경험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문학수업에 필수적인 이미지 훈련법이었다.
요즘엔 학교마다 논술 준비에 허덕이고, 가정에선 비싼 돈 들여 논술과외까지 하느라 난리라는데 우리는 저절로, 공짜로 ‘문학의 바다’에서 놀았던 것이다. 훌륭한 선생님 한 분의 힘이 이토록 크다는 것을 나는 지금도 느낀다.
혼불의 무대가 되었던 전북 남원시 사매면의 삭녕 최씨 폄재공파 종가(宗家)가 지난주 화재로 불타고 종부(宗婦) 박증순(93) 씨가 숨졌다고 한다. 생전에 선생님은 이 집에 자주 놀러 가 혼불 속의 효원 아씨의 모델로 알려진 박 씨와 얘기를 나누며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선생님이 살아계셨다면 박 씨의 참변에 얼마나 마음 아프셨을까. 졸업 후 한 번도 찾아뵌 적 없는 무심한 제자지만 슬퍼하실 선생님의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오래 아릿했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