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집 ‘블랙선’ 낸 힙합듀오 리쌍
2005년 말. 3집 타이틀곡 '내가 웃는 게 아니야'의 인기는 힙합듀오 '리쌍'에게 경제적 풍요를 안겨다주었다. 집도, 차도 좋았다. 하지만 "풍요로움이 정신적 사치로 이어졌다"며 활동 6개월 후 이들은 집을 뛰쳐나왔다. 멤버 개리(29)가 간 곳은 옥탑방, 길(30)은 어두컴컴한 지하방이었다. 힘든 시기 배를 움켜쥐고 살았던 그 곳에 이들은 종이와 펜을 들고 제 발로 찾아간 것. 17일 발매된 이들의 4집 앨범 '블랙 선'은 '메이드 인 옥탑방' 또는 '메이드 인 지하실'의 또 다른 이름이다.
"등 따습고 배부르니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는데 컴퓨터와 오디오 딱 2개만 있는 지하방에서는 한 시간 만에 음악이 절로 나오더군요. 늘 그렇게 초심을 지키고 싶어요. 우리는 100% 서민이니까요."(길)
2002년 데뷔한 이들이 내걸은 것은 바로 '된장 힙합'. '러쉬', '인생은 아름다워' 등의 초기 히트곡이나 2005년 발표한 '내가 웃는 게 아니야'나 '광대'는 마치 시끌벅적한 시골 시장처럼 인간적이다. 그러나 과거 앨범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라면 4집은 전국 곳곳에 차려진 시장에 두 멤버가 뛰어든 느낌이다.
동영상 촬영: 김범석 기자
"우리가 추구하는 된장 힙합의 실체는 바로 '너의 얘기가 곧 나의 얘기'라는 거죠. 앨범 작업을 위해 술집 종업원이나 대리운전 아저씨 등 우리 이웃들을 직접 만나 취재했는데 어찌 삶이 우울하던지…. 그래도 희망은 있을 거라는 생각에 앨범 제목을 '블랙 선'으로 지었죠."(길)
과거에도 그랬듯 어둡고 우울한 이들의 기본 '마이너' 곡조는 4집에서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007' 같은 빅밴드 곡이나 국악과 힙합을 접목한 '부자 프로젝트' 등에서 느낄 수 있는 흥겨움은 마치 시장 축제 같은 분위기.
"옥탑방 창문을 열면 앞에 60층짜리 아파트가 보여요. '저 꼭대기에 살면 서울 어디까지 보일까'하는 상상을 했는데 동네 주민들도 저처럼 같은 생각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쫄지마. 언젠간 희망이 있을 거야'라는 내용을 담아 '부자 프로젝트'란 곡을 만들었죠."(개리)
4집의 큰 특징은 전작들에 비해 이들의 태도가 다소 관조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휴대전화기 위치추적, 미니홈피로 대표되는 사생활 노출을 꼬집는 빅밴드 스타일의 '007', 술집 종업원과 술 취한 남자, 대리 운전기사 등 소시민의 비애를 다룬 '살아야 한다면', "배짱 두둑히 갖고 살자"라는 '영화처럼' 등 수록곡 전반의 주인공은 바로 이웃이었다.
"어릴 적만 해도 우리가 외치면 세상이 바뀔 거라 생각했죠. 마치 악의 무리에 대항하는 '로빈 훗'처럼. 그렇다고 우리가 진보적이라고 생각진 않아요. 우리 삶의 사소한 슬픔이나 기쁨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좋은 음악을 만드는 게 더 멋진 것 같아요. 그게 바로 '된장 힙합'의 핵심이죠."(개리)
현재 이들의 최대 관심사는 바로 다음 앨범이다. "4집이 우리 음악인생 1편의 끝"이라는 이들, '리쌍' 2편은 더 이상 암울하지 않은 걸까? "음악이 다 똑같아진 시대에 과거로 돌아가 1990년대 음악을 하겠다"는 이 각오는 '분노'에 가까웠다. 이러다가 아예 옥탑방, 지하방에 눌러 앉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기자의 걱정에도 웃기만 하는 이들, 어느새 '헝그리 정신'을 즐기는 듯 했다.
"팬들의 칭찬 한 마디에 자만할까봐 우리는 팬클럽도 없어요. 스스로 가둬놓는 걸 즐기는 것 같아 나중에 시멘트 방에 우리 몸 가두고 음악 하는 거 아닌지… 20년 후 우리 자식에게 '아빠 어디가서 음악으로는 안 꿀렸다'라고 말할 때 까지는 계속 '헝그리'해야죠."(길)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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